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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Mathematical Universe?
Mathematical Universe?
납득할 수 없는 수학적 우주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어느 날 줄리아 갈레프(Julia Galef)와 나는 […] 수학적 우주론자 맥스 테그마크(Max Tegmark)를 인터뷰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 일화는 수학적 우주 가설(MUH, Mathematical Universe Hypothesis)를 제시하는 맥스의 책이 출판될 무렵인 [2014년] 1월 말에 공개될 것이다. 우리는 활기차고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지만, 결국 나는 납득하지 못했다(그리고 나는 줄리아도 그랬다고 추측한다).
기본적인 생각은 실재의 궁극적 구조는 글쎄 수학적 구조라는 것이다. 이것이 논의의 핵심이기 때문에 잘 이해하기 바란다. 테그마크는 세계는 수학으로 가장 잘 서술된다는 평범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는 실재의 궁극적 본성이 바로 수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맥스가 이전과 다른 추론에 의거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결코 새로운 논제가 아니다. 사실상, 그 관념은 오랜 철학적 역사가 있으며,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철학적 입장―피타고라스주의, 즉 수학적 플라톤주의(mathematical Platonism)과 수학적 일원론(mathematical monism)―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유익하게 간주될 수 있다.
수학적 플라톤주의는 수학적 구조들이 마음에 독립적인 형식으로 실재적이라는 관념이다. 그것들은, 예를 들면, 의자와 전자와 같은 의미에서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또는 여타의) 마음에 독립적인 존재론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 잘 알다시피, 실제로 나는 수학적 플라톤주의에 공감한다(반드시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지만). 이 견해의 최고로 유리한 점은 이른바 “기적 부재” 논증, 즉 수학은 너무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효과적이기 때문에(세계와 관련된 것들을 예측하는 데) 결코 인간의 발명품일 수가 없으며, 오히려 아무튼 세계의 본질적인 얼개의 일부라는 생각이다. (흥미롭게도, 이 논증은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우리가 과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과학이 경험적으로 적절하다는 점이라는 반실재론적 입장에 대조적으로 실제로 과학은 세계가 어떠한지 서술한다―근사적으로―고 주장하기 위해 동일한 이름으로 제기하는 것과 동등하다.)
수학적 일원론은 수학적 구조들이 실재적일 뿐 아니라 저쪽에(또는 더 정확하게, 도처에)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적인 것이라는 더 강한 신조다.
플라톤주의와 일원론의 조합은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일단의 이론들을 낳는데, 테그마크의 MUH가 일례다. 과거에 우리는 래디먼(Ladyman)과 로스(Ross)의 존재자적 구조적 실재론(ontic structural realism), 즉 바닥에는 “객체” 또는 “사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수학적) 관계들만 존재할 뿐이라는 관념의 형식으로 다른 일례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나는 존재자적 구조적 실재론(또 다시, 반드시 그것을 믿지는 않은 채)과 더 일반적으로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즉, 알려진 최선의 물리학을 진지하게 여기는 형이상학)이라는 관념에 관해 긍정적으로 논평한 적이 있지만, 맥스 테그마크와 나눈 대화는 사실상 해명보다 의혹을 더 생성했다. 세계가 수학적 구조들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라는 의문에 의해 한 가지 명백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수학적 구조라는 관념은 잘 발달되어 있고, 그래서 그것은 쟁점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구조는 어떤 주어진 집합에 속하는 일단의 수학적 객체들의 한 특성이다. 예를 들면, 실수의 집합은 순서(그 어떤 주어진 수도 다른 한 수보다 적거나 크다), 척도(그 집합에 속하는 두 점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다), 대수적 구조(덧셈과 곱셈의 연산들) 등을 비롯한 많은 구조들이 있다.
문제는, 만약에 의미가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규정된 수학적 구조가 실제로 물리적 세계의 근본적인 구성물, 즉 의자, 전자 등을 구성하는 실체일 수가 있는지이다.
물론, 줄리아와 나는 맥스에게 바로 그 질문을 제기했으며, 우리 둘 다 그의 대답을 대단히 납득할 수 없었다. 테그마크가 전자 같은 기본 입자들이 궁극적으로는 사실상 수학적이라고 말했을 때, 줄리아는 그가 의미한 것은 그것들의 특성들이 수학적 양들로 서술된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맥스는 단호했는데, 예를 들어, 스핀(전자의 경우에 1/2이라는 크기를 갖는다)을 언급했다. 그런데, 어떤 입자의 스핀은 일반적으로 그것의 각운동량으로 서술되지만, 절묘하게 양자역학적인 특성(즉, 고전역학에서는 대응물이 전혀 없는)이고, 그래서 그것을 거시적 객체의 각운동량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줄리아와 나는, 그것은 수학적 양에 의해 서술되는 물리적 특성이며 수학적 양은 물리적 특성과 같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MUH 같은 이론들은 사실상 범주 오류에 근거하고 있지 않을까? 명백히, 나는 테그마크 같은 사람들이 “객체”라는 낱말과 “특성”이라는 낱말, 또는 “물리적”이라는 낱말과 “수학적”이라는 낱말의 일반적인 의미를 혼동하는 기본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그들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바로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을까?
MUH와 관련하여 다른 문제들도 있다. 한편, 테그마크의 관념들에 대한 여러 비판가들은 그것들이 명백히 편재하는(그리고 대체로 오해받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들과 상반된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테크마크와 파이트 헛(Piet Hut)과 논쟁하는 동안 마크 앨퍼드(Mark Alford)는 수학이 “저쪽에” 존재한다는 관념은 그것이 형식적 체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념과 양립할 수 없다고 넌지시 주장했다. 그 주장에 대해 테그마크는 괴델적으로 완전한 수학적 구조들만이 물리적으로 현존할 것[계산 가능한 우주 가설(CUH, Computable Universe Hypothesis)로 일컬어지는 것]이라고 응대했다.
명백히 이것은 맥스의 이론에 대해 심각한 문제들을 초래하는데, 성공적인 모든 물리적 이론이 대체적으로 CUH에 위배될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수학적 구조들의 풍경 대부분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아이쿠.
앞의 사실에 촉발되어 나도 맥스에게 괴델에 관해 물었는데, 그의 반응은 괴델과 관련된 문제들은 무한한 양들의 경우에만 나타난다는 것이었고, 자신은 무한에 회의적이라고 고백했다. 그것에 대해 나는 놀랐다. 당신이 무한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니 정말입니까? 나는 이것이 최소한 19세기에 게오르크 칸토르(Georg Cantor)의 작업 이래로 수학에서 꽤 잘 확립된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물론 테그마크는 수학적 무한자들이 아니라 물리적 무한자들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물리학에서는 무한자들을 생성하는 어떤 계산들이 존재하는데, 예를 들면, 블랙홀에 대한 서술에서 나타나는 특이점, 또는 상전이 현상들에 대한 표준적 서술들에서 가정되는 무한한 양들이 있다. 물리적 체계들에서 실제로 무한자들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은 미해결 상태이고, 그래서 확실히 맥스는 회의주의를 견지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된 괴델과 관련된 문제들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다소간 너무 편의주의적인 입장인 듯 보였다.
맥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줄리아도 나도 납득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쟁점은 중요한 것이다. 시험 가능성. 나는 양상 실재론(modal realism) 또는 충만의 원리(principle of plenitude)와 관련된 철학적 사변들에 대해 문제가 없지만(그리고 나는 긍정적인 형식으로 그 술어를 사용한다), 과학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면(테그마크가 확실히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변들은 경험적 실재와 접촉하는 것이 더 낫다. «실재여 잘 있거라: 현대물리학은 어떻게 과학적 진리 탐구를 배반했는가(Farewell to Reality: How Modern Physics Has Betrayed the Search for Scientific Truth)»라는 책에서 짐 배고트(Jim Baggot)는 이미 물리학자들이 과학을 수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하고 있다. 테그마크는 그런 추세의 최근 사례인가?
우리가 물었을 때, 그는 MUH도 경험적 예측 결과들을 제시한다고 주장했지만, 세부 내용에 대해 압박했을 때 대답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불만족스럽게 되었다. 예를 들면, 맥스는 한 가지 예측은 물리학이 계속해서 자연의 수학적 규칙성들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쎄, 아마도 그럴 것이지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MUH를 가정할 필요는 확실히 없다. 과거에 그는 이렇게 진술한 적도 있다. 우리가 평균적인 우주(수학적 구조들의 다중우주 속에서)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우리 우주가 얼마나 평범한지 평가함으로써 다중우주 예측들을 시험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중우주의 여타 부분들에 접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시험들을 수행할 것인가?
계속해서 맥스는 그의 가정은 “임의의 매개변수들이 없”고, 그래서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에 의해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논문을 검토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이론이 옳다면, 그것은 임의의 매개변수들이 없기 때문에 모든 평행우주들의 모든 특성들이 … 원칙적으로는 무한한 지적 능력을 갖춘 수학자에 의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 마침내, 레벨 IV 다중우주의 궁극적인 앙상블은 규정하는 데 아무 정보도 필요하지 않을 것인데, 그것이 임의의 매개변수들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명백한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무한한 지적 능력을 갖춘 수학자의 부재이고, 두번째는 앞에서 언급된 레벨 IV 다중우주가 바로 괴델에 의해 부가된 한계들의 결과로 급격히(그리고 비현실적으로) 축소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컴의 면도날은 유용한 발견법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그것은 어떤 이론을 선호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최종 중재자로 결코 사용되지 말아야 하는데, 특히 대단히 사변적이고 경험적으로 시험하기가 거의 불가능한(또는 심지어 완전히 불가능한) 그런 관념들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에는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한 세계 속 여러 세계들: 다른 우주들에 대한 탐색(Many Worlds in one: The Search for Other Universes)»라는 책에서 비판가 알렉스 빌렌킨(Vilenkin)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서] 수학적 구조들의 수는 복잡성이 커짐에 따라 증가하는데, 이것은 ‘평범한’ 구조들이 엄청나게 거대하고 복잡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것은 우리 세계를 서술하는 이론들의 아름다움 및 단순성과 상충되는 듯 보인다.” 그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테그마크는 더 복잡한 구조들에 더 낮은 가중치들을 할당하지만, 선험적인 정당화를 하지 않은 채 이것이 행해지기 때문에 그것은 임시방편적인 행위이고, 물론 오컴의 면도날에 위배된다. 그래서, 내가 맥스와 나눈 대화를 즐긴 만큼이나, 당분간 나는 MUH와 관련 가설들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우리는 그저 무한한 지적 능력을 갖춘 수학자가 출현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