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오래 살게 되니
암이 보였다
Preamble
요즘 암이 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이유가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오래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항생제의 황금기가 오기 전까지 우리 선조들은 암이 손을 뻗기 훨씬 전에 감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은 오래 산 자에게 돌아오는 계산서다.
암 자체는 히포크라테스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기원은 수천 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에게 완전한 수수께끼였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이 치명적인 병의 병인(病因)을 두고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폭넓은 지지를 얻은 것이 발암물질설이었다. 발암물질이란 화학물질, 자외선, X선, 방사선처럼 암을 일으키는 인자를 말한다.
제1장은 이 다섯 갈래의 학설을 차례로 훑어 나간다. 발암물질설, 기생충설, 바이러스설, 종양유전자, 종양억제유전자. 그리고 마지막에 바이오마커가 붙는다. 저자 지에 잭 리는 30년 넘게 화이자·BMS·레볼루션 메디신스에서 신약을 만든 화학자이자 서른다섯 권의 책을 쓴 사람이다. 그가 이 장을 여는 방식은 교과서의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꾼의 방식이다. 실험 프로토콜보다 사람이 먼저 나오고, 성공보다 실수가 더 오래 서술된다. 그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01
발암물질설
The Carcinogen Theory
1775년, 런던의 외과의사 퍼시벌 포트가 쓴 한 편의 논문이 씨앗을 심었다. 암은 독성 화학물질이 일으킨다는 생각이었다.
1.1.1포트와 굴뚝청소부의 음낭
이야기는 굴뚝 청소라는 독특한 직업에서 시작한다. 18세기 산업혁명은 석탄을 런던의 주된 난방 연료로 만들었다. 불완전 연소된 석탄의 그을음이 굴뚝에 쌓이면 그것이 곧 화재의 위험이 되었으므로, 많은 집주인들이 다섯 살에서 열한 살 사이의 아이들을 청소부로 고용했다. 몸집이 작아야 굴뚝 안으로 날렵하게 기어올라 검댕을 걷어낼 수 있었다.
포트는 이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드는 열다섯에서 열일곱 무렵 음낭에 이른바 '검댕 사마귀(soot-wart)'를 놀랄 만큼 높은 비율로 얻게 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일반 인구에서는 극히 드문 병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의 굴뚝청소부들은 상대적으로 이 종양에 덜 걸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대륙의 청소부들은 일을 마치면 매일 목욕을 했고, 영국의 동료들은 좀처럼 씻지 않았다. 포트는 원인이 음낭 피부의 주름 사이에 오래 끼어 있는 굴뚝 검댕이라고 제안했다.
엄밀히 말하면 포트는 노출과 암 사이의 인과를 문장으로 못 박지는 않았다. 그 일은 1790년 그의 사위 제임스 얼이 마무리했다. 1761년에는 또 다른 런던 의사 존 힐이 코담배를 과하게 쓰는 남자들에게서 비강암이 잦다고 보고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포트가 환경 발암물질과의 직접 접촉으로 생긴 악성종양을 처음으로 지목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의학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화학적 발암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시작한다.
음낭암과 고환암은 굴뚝청소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석탄 증류 노동자, 광유에 노출된 노동자에게도 찾아왔다. 이들 직업에 공통된 발암물질은 다환방향족탄화수소(PAH)였다. 용광로와 코크스 오븐에서 나온 콜타르를 증류하면 얻어지는 안트라센, 크레오소트, 나프탈렌이 모두 강력한 발암물질이다.
포트는 발암물질설의 전조를 울렸을 뿐이다. 이 학설을 검증하려면 동물 모델이 있어야 했다. 사람에게 암을 일으켜 보는 일은 용납될 수 없었으므로. 전 세계, 특히 유럽의 과학자들이 쥐와 토끼에 암을 만들어 보려 부지런히 애썼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 일을 처음 해낸 사람은 포트의 논문이 나온 뒤 거의 140년이 지나서 등장한 일본인이었다.
1.1.2야마기와 가쓰사부로와 토끼의 귀
포트 이후 직업성 종양의 보고가 쌓여 갔다. 동독 지역의 우라늄 광부들은 당시로선 희귀병이던 폐암에 걸렸다. 손목시계 바늘에 발광 라듐을 칠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방사성 물질이 묻은 붓끝을 입으로 다듬는 습관 때문에 혀암 발생률이 무섭게 높았다. 1890년대에는 유럽 염료 공장에서 아닐린을 다루는 노동자들에게 방광 종양이 잦다는 관찰이 나왔다.
19세기 유럽은 과학의 중심이었고, 포트의 관찰을 동물에서 재현하려는 시도가 한 세기 반 동안 수없이 이어졌다. 모두 실패했다. 그리고 결국 돌파구를 만든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야마기와 가쓰사부로는 1863년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유신이 집안을 몰락시켜 극심한 가난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럼에도 정규 교육을 받고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892년 정부의 파견으로 독일에 건너가 로베르트 코흐에게서 새로 소개된 투베르쿨린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코흐의 조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베를린으로 옮겨 또 하나의 전설, 루돌프 비르효 밑에서 2년간 병리학을 수련했다.
이 이적이 결정적이었다. 1858년 비르효는 발표한 자극설(irritation theory)에서, 어떤 자극에 의한 만성 염증이 암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종양 발생에서 염증이 갖는 본질적 역할을 처음 세운 셈이다. 비르효의 자극설은 야마기와에게 깊이 각인되어 훗날 화학적 발암의 동물 모델로 이어진다.
1895년 귀국해 도쿄제국대학 병리학 교수가 된 야마기와는 1911년부터 조수 이치카와 고이치와 함께 토끼를 모델로 암의 원인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하루 세 번, 토끼 귀 안쪽에 조(粗)콜타르를 붓으로 발랐다. 250일이 지난 뒤, 137마리 중 7마리의 귀에 기괴한 피부종양이 자랐다. 그중 두 마리는 악성이었다.
참으로 무던한 인내가 마침내 값을 받은 것이다. 이 두 사람 앞에 수많은 과학자가 같은 방법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효과가 나타날 만큼 오래 실험을 끌고 갈 끈기가 없어 중도에 접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시간을 견디는 능력은 종종 통찰만큼 값이 나간다.
1915년 도쿄의학회에서 발표된 이 결과는 화학물질이 동물에서 암을 일으킨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인 사건이었다. 곧이어 야마기와의 다른 제자가 콜타르로 누드마우스 등에 같은 종양을 유도했다. 토끼 귀보다 다루기 쉬운 계였다.
동료와 제자 모두에게서 존경과 애정을 받았던 야마기와는 소박하게 살았다. 유일한 낙은 시였다. 하이쿠에 심취했던 그는 토끼 귀에 인공적으로 암을 만들어 낸 뒤의 깊은 만족을, 과연 그답게 한 수의 하이쿠로 남겼다.
암이 생겼다!
의기양양 몇 걸음 걸어 본다.
이 두 줄 앞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250일간 하루 세 번, 토끼 귀에 콜타르를 바른 사람이 남긴 문장이다. 자랑도 격정도 없이 다만 몇 걸음. 과학사에서 이만큼 절제된 승리의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야마기와의 발견이 종양학에 미친 파급은 막대했다. 실험실에서 암을 만들어 낼 수단이 생겼다는 뜻이고, 특정 발암물질과 그 작용 방식을 조사할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1920년대에 런던의 유기화학자 제임스 쿡이 콜타르에서 발암성이 가장 강한 탄화수소가 PAH임을 규명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야마기와와 이치카와는 최소 세 차례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나 끝내 받지 못했다. 동물 모델에서 인공적으로 암을 유도한 공로로 주어진 상은 1926년 덴마크의 병리학자 요하네스 피비게르에게 갔다. 뒤에 나올 이야기다. 그럼에도 동료들이 그 업적을 잊지는 않았다. 1966년 페이턴 라우스는 노벨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1918년, 토끼 피부에 타르를 바르면 종양이 생긴다는 야마기와와 이치카와의 획기적인 발견이 나왔다. 이것이 같은 일을 하는 다른 화학적 인자들 — 그리고 물리적 인자들까지 — 을 찾는 보람 있는 시대를 열었다.”
페이턴 라우스, 노벨상 수상 강연, 1966
연도를 1918년으로 적은 것은 라우스의 착오지만, 헌사의 무게는 그대로다.
1.1.3브루스 에임스와 돌연변이원
“과학에서 공로는 세상을 설득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 생각을 처음 떠올린 사람에게 가지 않는다.”
윌리엄 오슬러
야마기와 덕분에 동물에서 종양을 유도하는 일이 가능해지자, 원리상으로는 어떤 화학물질의 발암성이든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토끼와 쥐는 비싸고 번식이 느리며, 종양이 나타나기까지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린다. 더 빠르고 더 믿을 만한 대안이 절실했다. 그 문제를 1970년대에 세균 시험으로 해결한 사람이 브루스 에임스다.
에임스가 세균으로 화학적 돌연변이원을 찾은 첫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방법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다듬었고, 타고난 세일즈맨답게 전 세계 모두를 설득해 쓰게 만들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이 붙은 에임스 시험은 '세상을 바꾼 시험'으로 불린다.
돌연변이원이란 표적 세포의 DNA를 손상시켜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만드는 물질이다. 1944년 토머스 헌트 모건이 화학무기 겨자가스가 초파리에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것을 밝히면서, 과학자들은 여러 생물을 써서 돌연변이원과 발암물질의 연결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1928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난 에임스는 아버지가 고등학교 화학 교사여서 고교 시절부터 실험을 했다. 1946년 코넬대에 화학 전공으로 진학했지만 학업 밖의 일에 마음을 너무 많이 나눠 준 탓에 평범한 학생이었고 시험을 진지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칼텍 대학원에서 두각을 나타내 1953년 필수 아미노산 히스티딘의 생합성 경로를 처음으로 밝힌다. 이 한 가지 사실이 그의 훗날 경력 전체를 결정한다.
NIH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다시 히스티딘 생합성의 효소학을 다루고, 1961년에는 케임브리지의 프랜시스 크릭 연구실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1962년부터 NIH 분자생물학 실험실의 섹션장을 지내다 1967년 버클리로 옮긴다.
독립 연구를 파라티푸스균의 유전자에서 시작한 그는 1970년대 초, 값비싸고 처리량이 낮은 설치류 대신 세균으로 돌연변이성을 조사하는 흐름에 합류한다. 세균은 천문학적 숫자로 자라고 20분마다 한 세대를 갈아 낸다. 널리 쓰이던 대장균 대신 그는 성장에 히스티딘을 요구하는 살모넬라를 골랐다. 특히 Salmonella typhimurium의 히스티딘 요구성 균주가 유용했다.
원리는 우아하다. 히스티딘은 대부분의 생물에게 아홉 가지 필수 아미노산 중 하나다. 어떤 화학물질이 세균으로 하여금 전에는 만들지 못했던 히스티딘을 배지의 전구체로부터 합성하게 만든다면, 그 세균은 최소배지에서 살아남아 자란다. 세균이 히스티딘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유전자가 건드려졌다는 확증이다. 따라서 접시 위의 콜로니는 곧 돌연변이의 표시다. 정량적으로도 성립한다. 콜로니 수는 시험 물질의 돌연변이력에 정비례한다.
에임스는 감도를 계속 높였다. 대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설치류 간의 균질액 분획을 혼합액에 넣었다. 포유류 간 마이크로솜에는 여러 대사효소가 들어 있으니, 시토크롬 P450 제제를 살모넬라 균주와의 배양에 넣으면 대사활성화가 일어난다. 그러면 원래 물질은 돌연변이원이 아니어도 그 대사체가 돌연변이원인 경우를 잡아낼 수 있다. 오늘날 규제 시험의 표준이 된 대목이다.
시험이 완성 단계에 이르자 에임스는 모두를 설득하는 일에 나섰고,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균주 시료를 무상으로 보냈다. 이틀 만에 값싸게 돌연변이성을 측정하는 방법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고, 지금은 세계 모든 규제기관이 약물의 돌연변이성 평가에 이 시험을 요구한다.
에임스는 자기 이름이 붙은 이 시험에 특허를 내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이 쓰게 하려는 뜻이었다. 특허를 냈다면 엄청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부유해지는 것은 그의, 그리고 그 담박한 시대 동료들의 인생 목표가 아니었다. 원저자는 이 대목에 한마디를 붙여 두었다. 오늘날은 정반대다. 납세자의 돈으로 한 연구의 발견에 특허를 걸고 부자가 되는 일이 찬양된다. 겨우 몇십 년이 이렇게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여담 하나 더. 550편 넘는 논문을 쓴 그를 사람들이 만나면 늘 “그 시험을 만든 브루스 에임스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그건 자기 아버지가 만든 것이라고 농담으로 받았다.
정작 에임스에게 시험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그의 목표는 세균 유전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이었다. 그의 연구실과 다른 연구실의 결과는 살모넬라 돌연변이성과 설치류 발암성 사이에 85%의 일치도를 보여 주었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그는 방대한 데이터로 “발암물질은 돌연변이원이다”라는 명제의 참됨을 확인했고, 동물에서 암을 일으키는 화합물이 단순한 세균계에서도 DNA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것을 밝혔다. 요컨대 돌연변이원과 발암물질은 거의 동의어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암물질설은 모든 암의 발생을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석면은 중피종을 일으키지만 돌연변이원이 아니다. X선, 자외선, 방사선이 종양을 만든다는 사실도 당시의 틀 안에 앉히기 어려웠다. 1980년대에 천연물을 에임스 시험에 넣어 보았더니 뜻밖에 많은 것이 세균을 변이시켜 자라게 했다. 천연 화합물은 무해하다고 '되어 있는' 물질이다. 에임스 시험을 무조건 믿는다면 커피 한 잔에 최소 19종의 발암물질이 들어 있는 셈이 된다.
특수한 경우의 애매함이 남아 있음에도, 에임스 시험 양성은 지금도 어떤 신약 개발 과제에서든 붉은 깃발이다. 무엇보다 에임스는 병인학의 핵심을 처음으로 겨눈 공로가 있다. 암은 궁극적으로 유전자 돌연변이의 병이다.
검증은 1982년에 왔다. MIT 화이트헤드 연구소의 로버트 와인버그와 그의 학생 시자오 시(Chiaho Shih)는 콜타르 발암물질로 암화된 세포에서 DNA를 뽑아 정상으로 보이는 세포에 넣었다. 일부 세포가 암성 성장을 보였다. DNA가 실제로 활성 암 유전자를 옮긴 것이다. 화학 발암물질의, 그리고 X선·자외선·동위원소 방사선의 표적이 DNA라는 데 강력한 신빙성이 붙었다. 암세포의 악성 행동을 몰고 가는 것은 유전자의 활성이다.
암의 병인을 찾는 길은 길고 험했다. 1926년, 노벨 의학상은 암의 기원을 두고 '기생충설'에 잘못 수여되었다.
02
기생충설,
혹은 노벨상이
틀렸던 날
The Worm Theory
20세기 초, 과학자들이 아직 암의 기원을 두고 헤매고 있을 때 덴마크에서 흥분한 소식이 날아왔다. 요하네스 피비게르가 암의 원인을 단번에 밝혀냈다는 것이었다.
일찍이 1776년, 한 프랑스 외과의사가 아무 근거 없이 오직 직감으로 암은 감염성 인자가 일으킨다고 확신한 적이 있다. 그 생각의 계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코펜하겐의 피비게르가 쥐의 위 종양과 어떤 벌레의 관계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피비게르의 집안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중산층에서 참담한 궁핍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젊은 시절 고독과 고립에 시달렸고 성인이 되어서는 조울증을 견뎠다. 1890년 코펜하겐대학에서 세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베를린에서 2년을 더 공부한 뒤, 코펜하겐 병리해부학 연구소에서 일하다 1897년 서른셋에 소장이 된다.
1907년, 야생 쥐의 위 조직을 조사하던 그는 일부에서 사마귀 같은 위 병변을 발견했다. 연구소 근처 코펜하겐 제당공장에서 잡은 쥐 61마리 중 40마리의 위에 특이한 선충이 있었고, 그중 7마리가 그가 '암'이라 부른 병변을 갖고 있었다. 같은 공장에서 잡은 바퀴벌레들은 유충 단계의 선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Spiroptera carcinoma라 명명했다. 실험실에서 그는 선충에 감염된 바퀴벌레를 건강한 쥐에게 먹여 비슷한 병을 유도할 수 있었다. 유충이 바퀴벌레의 기생체로서 쥐에게 들어가 자극이나 독으로 위 종양을 일으킨다는 논리였다. 요컨대 선충이 발암물질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1919년의 발표는 의학계를 전율시켰다. 그 위엄 있는 덴마크인이 드디어 해냈다, 그토록 오래 모두를 괴롭혀 온 문제를 마침내 풀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피비게르가 암 연구의 새 새벽을 열었으며 모든 젊은 과학자에게 영감을 준다고 널리 믿어졌다. 1923년 스웨덴의 병리학 교수 폴케 헨셴이 그를 노벨위원회에 추천하며 이렇게 썼다. “피비게르 업적의 중요성은, 악성종양의 모든 특징을 갖춘 조직의 갱신을 실험적으로 유도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 있다.”
피비게르는 192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2년 앞선 1924년, 대만에서 일하던 한 일본 병리학자가 그 섬에 사는 선충 감염 쥐들의 위에는 악성종양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피비게르의 학문적 위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그는 이 불일치를 “다른 지역의 다른 벌레에 감염된 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버렸고 그것으로 넘어갔다. 1930년대에는 컬럼비아대학의 한 과학자가 피비게르의 결과를 재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피비게르가 본 '종양'은 결국 악성이 아니었다. 쥐 먹이에 비타민 A가 부족해서 생긴 조직 증식이었을 뿐이다. 1937년에는 아무도 재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의 발견이 사실상 폐기되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피비게르는 그 진실을 알게 되는 고역을 면했다. 노벨상을 받은 지 6주 뒤인 1928년, 그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되었나
원저자는 세 가지 이유를 든다. 이 대목이 이 장에서 가장 값진 부분이다.
- 병인학을 부각하려는 선의. 피비게르를 고른 큰 동기 중 하나는 암 병인학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확립된 동물 모델이 곧 효과적인 치료로 이어지리라는 기대였다. 지극히 정당하고 관대한 이유다. 문제는 선의가 검증을 앞질렀다는 데 있다.
- 흠 없는 학문적 명성. 1890년대에 젊은 피비게르는 저 위엄 있는 코흐와의 논쟁에서 이겨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코흐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핵에 걸린 소의 젖을 먹은 아이들의 장결핵이 소에서 왔음을 확실하게 입증한 것이다. 어찌나 철저하고 신중한 연구자였던지, 동시대인들은 그의 어떤 주장에도 반론을 대기를 꺼렸다. 그는 진리를 찾는 과학의 등불로 여겨졌다. 명성은 이렇게 검증을 잠들게 한다.
- 지리적 근접성과 인맥. 마지막 이유는 덴마크와 스웨덴이라는 두 스칸디나비아 이웃의 거리다. 피비게르는 스웨덴 의학회 회원이었고 스웨덴의 저명한 병리학자 다수와 함께 연구했다. 그를 추천한 폴케 헨셴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고, 그 역시 평생을 암의 원인을 찾는 데 바친 사람이었다. 헨셴이 피비게르에 대한 칭찬에 넉넉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일부 기생체의 발암 작용은 인정되고 있다. 1983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임상병리의사 로빈 워런과 내과의사 배리 마셜은 굽은 세균 Helicobacter pylori를 위궤양과, 이어 위암과 연결하는 논문을 냈다. 이 미생물과 위암의 연관은 이후 견고하게 확립되었다. 2005년, 피비게르의 노벨상으로부터 79년 뒤에 워런과 마셜은 발암 세균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이번에는 스톡홀름이 아주 제대로 맞혔다.
03
발암 바이러스
Cancer-Causing Viruses
어떤 감염이 특정 악성질환의 근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데는 오늘날 이견이 거의 없다. 위암을 일으키는 헬리코박터가 세균의 예이고, 그보다 흔하게는 여섯 종쯤의 바이러스가 발암에 기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8년 두 덴마크인 빌헬름 엘레르만과 올루프 방은 닭에서 '여과성 병원체'로 전달되는 백혈병을 기술했다. 파스퇴르의 제자 샤를 샹베를랑이 발명한 미세다공 컬럼을 통과하는 무엇이었다. 당시 '바이러스'라는 용어가 아직 정의되지 않았으므로 여과성 병원체가 오늘의 바이러스에 해당한다. 조류 백혈병 바이러스가 암을 일으킨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당시 백혈병은 암의 한 형태로 여겨지지 않았고, 닭은 포유류가 아니어서 사람과 무관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래서 이 덴마크의 발견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1911년 페이턴 라우스가 닭에서 종양을 전달하는 사르코마 바이러스를 발견한다. 역시 포유류가 아닌 닭이었다. 사르코마(sarcoma, 육종)는 힘줄·관절·인대 같은 결합조직에 생기는 비교적 드문 암이고, 카르시노마(carcinoma, 상피암)는 내부 장기와 피부의 암이다. 림포마(lymphoma, 림프종)는 면역계의 일부인 림프계의 암이다. 이 세 단어의 구분은 이 장 전체를 읽는 데 계속 쓰인다.
라우스 사르코마 바이러스는 이후 바이러스학과 종양학 양쪽에 이례적으로 멀리 미치는 영향을 남겼고, 라우스 자신은 종양바이러스학의 아버지로 널리 꼽힌다.
그러나 라우스는 4년을 애썼음에도 바이러스를 분리해 그 본성을 밝히지 못했고, 결국 동료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1910년대의 과학계는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좌절한 그는 발암 바이러스 연구를 중단해 버렸다.
1918년 대유행(스페인 독감)이 지난 뒤, 라우스의 동료 리처드 쇼프가 독감 바이러스의 발견에 크게 기여했다. 1932년 쇼프는 토끼 피부 사마귀를 조사하다 그 종양이 여과성 병원체에 의한 것임을 확인했고, 그 바이러스를 다른 토끼에게 옮겨 일부에서 섬유종이 생기는 것을 보였다. 오늘날 '쇼프 파필로마바이러스'로 불리는 이 토끼 파필로마바이러스의 성공이 라우스를 다시 발암 바이러스로 불러들였다. 라우스는 이 바이러스와 몇 가지 화학물질을 조합하면 토끼에 악성 암이 생김을 보인다. 결과가 어찌나 흥분되었던지 그는 스스로 이렇게 적었다. “…밤에 잠들지 못하고 이 발견들에 몸을 떤다.”
새롭고 흥분되는 발견을 하는 일은 과학자에게 참으로 흡족하고 감미로운 느낌이다. 원저자가 붙인 이 한 문장은 이 책이 왜 교과서가 아닌지를 잘 보여 준다.
1965년 버클리의 페터 두스베르크가 이미 상징이 된 라우스 사르코마 바이러스에서 비교적 큰 RNA를 온전하게 분리한다. 그 이듬해 라우스는 노벨상을 받았다. 첫 보고로부터 55년 뒤였고, 그의 나이 여든아홉이었으며, 그는 여전히 실험실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다. 이 발견은 일부 암이 감염성 병인을 갖는다는 것을 보였고, 최초의 종양유전자 발견으로 이어져 발암의 분자기전에 토대를 놓았다. 오늘날 이 바이러스는 쥐·랫·중국햄스터 등 여러 실험동물에서 200종이 넘는 원발성 육종을 유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바이러스로 훗날 세 개의 노벨상이 더 나온다.
사람에게서 첫 발암 바이러스는 1964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앤서니 엡스타인과 이본 바가 찾았다. 엡스타인–바 바이러스는 버킷 림프종을 일으키는데, 이 종양은 특정한 염색체 전좌 세트와 연결된 최초의 인간 종양 중 하나다. 1980년에는 NCI의 로버트 갈로와 박사후연구원 버니 포이스가 피부 T세포 림프종 환자의 림프구에서 최초의 인간 레트로바이러스인 HTLV를 분리·동정했다. 독립적으로 일본 규슈에 유행한 성인 T세포 백혈병을 연구하던 일본 과학자들도 HTLV를 찾았고, 1981년 히누마 요리오가 이를 분리·확인해 갈로의 발견을 뒷받침했다.
발암 바이러스에 주어진 노벨상
- 1976 · 바루크 블럼버그 — B형 간염 바이러스(HBV). 간세포암을 일으킨다. 대만의 한 역학연구에서 HBV에 감염된 공무원은 감염되지 않은 동료보다 간암 위험이 100배까지 높았다.
- 1988 · 하랄트 추어 하우젠 — 인유두종바이러스(HPV). 자궁경부암을 일으킨다. 역학적으로 성적 접촉이 많은 개인이 HPV에 더 취약하며, 독신 수녀의 자궁경부암 발생률은 0이다.
- 2020 · 하비 올터, 마이클 호턴, 찰스 라이스 — C형 간염 바이러스(HCV). 간암과 간세포암을 일으킨다.
모두 합해 일곱 종의 인간 바이러스가 인간 암의 20%를 일으킨다. 그러나 발암 바이러스는 나머지 80%의 병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암은 유전자의 병이다. 원종양유전자, 종양유전자, 종양억제유전자라는 개념이 있어야 대부분의, 어쩌면 모든 인간 암의 발생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04
종양유전자
Oncogenes
오늘날 암세포의 폭주하는 성장은 배신한 한 세포에서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의 결과라고 널리 믿어진다. 그러니까 암은 결국 우리 유전자의 문제이며, 현대 유전학의 발생은 1860년대 그레고어 멘델의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1멘델의 완두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모라비아에서 자란 멘델은 젊은 시절 빈대학에서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스승 중에는 도플러 효과로 이름난 물리학 교수 크리스티안 도플러가 있었다. 그러나 훌륭한 교육이 시험 능력으로 번역되지는 않았다. 그는 시험 앞에서 지나치게 긴장했고, 꿈이던 고등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두 번 낙방해 결국 대리교사로 남았다. 극심한 생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그의 방식은 특이했다. 여섯 달쯤 자리에 눕는 것이었고, 평생 최소 두 번 그렇게 했다.
대학을 마치고 브륀의 성 토마스 수도원에서 아우구스티노회 수사가 된 그에게 유전 연구는 취미이자 강박이 되었다. 1856년부터 수도원 정원과 온실에서 완두(Pisum)를 고되게 교배했다. 수천 그루를 상대로 7년간 꼼꼼히 잡종화 실험을 한 끝에, 식물도 물리학처럼 일정한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알아냈다. 완두의 일곱 가지 형질 — 꽃 색, 씨 모양 등 — 을 살펴 그것이 부모에서 자손으로 전달됨을 확인했다. 놀라운 우연으로, 오늘 우리는 멘델의 완두가 세포마다 정확히 일곱 쌍의 염색체를 갖는다는 것을 안다.
또 하나의 핵심 통찰은 유전 인자가 쌍으로 존재하며 각 부모로부터 한쪽이 전달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양쪽 부모가 모두 형질 전달에 관여하지만 동등하게 기여하지는 않는다. 찰스 다윈을 포함해 그 이전의 과학자들이 잘못 믿은 지점이다. 멘델은 우성과 열성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한쪽 부모가 자손에게 훨씬 많은 유전자를 줄 수 있으나, 다른 쪽의 형질도 여전히 존재해 훗날 세대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형질이 '한 세대를 건너뛴다'는 항간의 말에는 실제로 유전학적 근거가 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식물학의 발견에 정량적 방법을 처음 적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빈대학에서 배운 최신 방법론을 그대로 가져왔다. 보이지 않는 유전 인자에 수학과 통계를 적용해, 2세대 형질에 관한 유명한 3:1 비를 얻었다. 지금 우리가 멘델의 유전 법칙이라 부르는 것이다. 1865년 초 그는 브륀 자연과학회에서 「식물 잡종에 관한 실험」을 2회에 걸쳐 강연했고, 그 강연은 즉각 아무 반응 없이 흘러갔다.
이유를 설명할 도리도 없이, 멘델의 법칙은 35년간 완전한 학문적 공백 속으로 사라졌다. 유전 인자에 대한 그의 수학적·통계적 처리를 동시대인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 있었다.
현실은 종종 소설보다 극적이다. 1900년 봄, 유럽 세 나라의 서로 다른 세 과학자가 동시에 멘델의 법칙을 재발견해 되살렸다. 세 편의 논문이 두 달 안에 발표되었다.
세 사람 모두 멘델의 원논문을 성실하게 인용해 견고한 학문적 정직성을 보였다. 1905년 덴마크 식물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멘델의 보이지 않는 유전 단위를 유전자(gene)로 다시 명명한다.
1936년 영국의 로널드 피셔는 카이제곱(χ²) 분석을 근거로 멘델이 데이터를 위조했다고 고발했다. 결과가 너무 좋아서 참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자기 이론이 더 설득력 있게 보이도록 데이터를 골라 썼다는 주장이었다.
오늘 우리는 카이제곱이 일반적으로 위조 데이터를 잡아내는 데 적절한 검정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멘델 데이터의 전제 조건에 카이제곱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므로 피셔의 결론은 무효다. 게다가 피셔의 고발은 이후 여러 각도에서 여러 과학자에게 논파되었다.
실제로 멘델의 정직성은 검증을 견뎠다. 뮌헨의 영향력 있는 식물학자 카를 네겔리의 강권으로 멘델은 조밥나물(Hieracium) 교배에 손을 댔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그만두었다. 조밥나물이 무성생식에 의존해 자신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이론에 맞지 않는 결과를 그대로 내놓는 태도 — 이것이 데이터를 골랐다는 혐의를 가장 잘 반박한다.
멘델의 유전 법칙은 시간의 시험을 몇 번이고 견뎠다. 그레고어 신부는 이제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삶에서 일반적으로, 그리고 과학에서 특히, 옳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1.4.2모건의 초파리, 그리고 염색(染色)이라는 사건
현미경은 과학의 추구에서, 특히 생물학과 의학 연구에서 언제나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도구였다. 1665년 영국의 로버트 훅이 원시적인 현미경으로 살아 있는 세포를 보았다. 배율이 계속 커지면서 과학자들은 더 작은 것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결정적인 것은 배율이 아니라 색이다. 1856년 런던의 열여덟 살 학생 윌리엄 퍼킨이 보라색 염료 모브(Mauve)를 합성했고, 뒤이어 주로 독일에서 수많은 합성염료가 만들어졌다. 이 염료들이 천연염료와 함께 세포를 물들여 현미경 상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세포 관찰은 세포분열과 핵 속에서 쉽게 염색되는 물체들의 행동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낳았다.
1887년경 세포분열 중 핵 안에서 '실'의 분리와 복제가 일어난다는 관찰이 나왔다. 이듬해 독일 해부학자 하인리히 발다이어가 이 실을 염색체(chromosome)라 불렀다. 그리스어로 '색이 있는 몸'이라는 뜻이다. 세포 배양 표본에서 어찌나 쉽게 물들어 눈에 띄었던지 그런 이름이 붙었다. 현미경 아래에서 염색체는 세포분열 때 두 배가 되었다. 유전의 단서가 어른거렸으나 아직 해독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페이지의 색이 어두운 자리에서 시작해 헤마톡실린과 에오신으로 물들어 오는 것은 그래서다. 보이지 않던 것에 색을 입히자 비로소 보였다. 이 장 전체가 그 이야기다.
인간 세포핵이 23쌍 46개 염색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1955년에 확정된다. 사람 정자의 머리는 대부분 23개 염색체로 이루어지고 난자가 나머지 23개를 준다. 이 정확한 계수는 스웨덴 룬드에서 일한 인도네시아 화교 과학자 조 힌 티오가 1955년에 절묘하게 해냈다. 그는 동료 알베르트 레반이 1938년에 개발한 기법을 써서 콜히친으로 분열 중인 세포를 그 순간에 얼려 세웠다.
염색체 이상의 결과로 알려진 질환이 여럿이다. 겸상적혈구빈혈, 다운증후군, 만성골수성백혈병(CML)이 그렇다.
- 1949 · 겸상적혈구빈혈 — 라이너스 폴링의 연구 덕에 11번 염색체 헤모글로빈 베타 사슬 유전자의 단 하나의 뉴클레오타이드 돌연변이에서 온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선례는 뒤에 ras 이야기에서 다시 등장한다.
- 1959 · 다운증후군 — 21번 염색체가 한 벌 더 있는 것과 연관된다.
- 1960 · 필라델피아 염색체 — 필라델피아의 데이비드 헝거포드와 피터 노웰이 CML 환자에서 비정상 염색체를 찾아냈다. 두 발견자가 일한 도시를 기려 이름이 붙었다. 암이 유전적 변화 때문일 수 있다는 최초의 증거 가운데 하나다. 뒤에 재닛 롤리가 이것이 9번과 22번 염색체 사이 유전물질이 맞바뀐 상호전좌의 결과임을 밝혔다. 이 염색체가 훗날 이마티닙(글리벡)으로 이어진다.
- 버킷 림프종 — 8번과 14번의 상호전좌로 비정상 14번 염색체가 생기고, 그 결과 myc 종양유전자가 활성화된다.
1905년 스티븐스는 두 권짜리 『정자형성 연구』를 냈다. 밀웜에서 크기가 다른 한 쌍의 염색체를 검출했고, 두 성별이 염색체 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포에서의 크기로 구분됨을 보고했다. 나아가 작은 염색체(Y)는 수컷에만 있고 큰 염색체(X)는 암컷에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어 꼼꼼한 세포학적 검사로 귀뚜라미와 크로톤벌레를 포함한 수십 종 곤충에서 Y 염색체의 유전이 수컷 발생과 상관됨을 보였다. XY는 수컷, XX는 암컷이며 Y는 늘 우성, X는 예외 없이 열성이다.
브린모어의 동료 에드먼드 윌슨도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가장 역설적인 일은, 저 위대한 토머스 헌트 모건이 1910년까지, 스티븐스의 연구가 발표된 지 몇 해가 지나도록 염색체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 모건이 이후 염색체 분야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그 공로로 1933년 “유전에서 염색체가 하는 역할에 관한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과학사는 이런 반전을 좋아한다.
1866년 켄터키 렉싱턴에서 태어난 모건은 존스홉킨스에서 미국 생물학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윌리엄 브룩스 아래 박사를 받았다. 처음 브린모어, 이어 컬럼비아, 마지막에 칼텍 교수가 되었다. 1909년 컬럼비아에서 그가 초파리로 유전학을 연구한 이유는 우아하지 않다. 실험실 공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연구실이 이미 살아 있는 쥐, 랫, 불가사리, 닭, 비둘기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초파리 Drosophila melanogaster는 유전학 모델로 훌륭했다. 큰 염색체가 네 쌍뿐이어서 보통 현미경으로도 관찰이 편하고, 생활주기가 14일이라 사시사철 번식하며 연 30세대를 낸다. 모건은 짧은 시간에 많은 세대를 내는 이 곤충에서 돌연변이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우스운 사실 하나. 초파리의 한 유전자에 드물게 생기는 돌연변이는 더듬이 자리에 다리가 난 초파리를 만들 수 있다.
처음 멘델의 법칙을 의심했던 모건은 자신의 초파리 연구로 곧 그 참됨을 확신했고, 이후 멘델 유전과 염색체 유전설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었다. 1910년 논문에서 그는 정상적인 붉은 눈이 아닌 드문 흰 눈 초파리의 돌연변이가 통상의 멘델 유전 양식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흰 눈 변종이 수컷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했다.
광범위한 초파리 연구에서 모건은 유전자가 염색체 위에 선형으로 배열된다는 이론을 세웠다. 유전자는 정해진 선형 순서로 놓이며 염색체 위의 특정 위치를 점한다. 그는 이 배열을 '실에 꿴 구슬'로 비유했다. 염색체가 실이고 유전자가 구슬이다. 연관과 교차도 발견했다. 대학원생들과 함께 형질을 설명하는 유전 단위를 담은 최초의 선형 염색체 지도를 만들었고, 1915년 주저 『멘델 유전의 기구』를 출간해 염색체설과 멘델의 원리를 단단히 잇는다.
1928년 모건의 제자 헤르만 뮐러(1946년 노벨상)가 X선이 초파리의 유전자를 손상시킬 수 있음을 입증했다. 발암물질(X선)이 곧 돌연변이원이라는 것을 처음 보인 사람이다. 에임스의 명제가 1970년대에 완성되기 전, 그 씨앗은 여기 있었다.
1.4.3오즈월드 에이버리의 DNA
프리드리히 미셰르가 DNA를 분리한 것은 멘델이 유전 법칙을 발견한 것과 같은 시대다.
갓 의사가 된 스물넷의 미셰르는 독일 튀빙겐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1869년, 환자의 수술 후 붕대에 묻은 고름에서 모은 백혈구의 핵으로부터 그는 인(P)을 이례적으로 많이 함유하고 황(S)은 없는 산성 화합물을 분리했다. 그는 이 새 유기물을 뉴클레인(nuclein)이라 불렀다.
원고를 지도교수에게 보냈더니 그는 회의적이었다. 그때까지 세포에서 분리된 물질 중 인을 함유한 것이 거의 없었으니 당연했다. 교수는 원고를 넘기기 전에 스스로 실험을 반복해 보기로 했고, 확신이 든 뒤 1871년에 발표되도록 했다. 지도교수의 이 신중함은 재현이 얼마나 값진 절차인지를 보여 주는, 이 장에서 드문 미담이다. 뒤에 미셰르는 라인강에서 잡은 연어의 정액에서도 뉴클레인을 분리했다. 어류 정액은 세포질이 거의 없이 핵이 대부분인 아주 큰 세포로 되어 있고, 대량으로 얻기도 쉬웠다. 1889년 그의 제자 리하르트 알트만이 뉴클레인을 핵산으로 개명한다. 미셰르의 뉴클레인이 DNA였다.
그러나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역할은 1944년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록펠러 연구소의 캐나다계 미국 면역학자 오즈월드 에이버리가 그것을 밝혔다. 그는 영국인 프레더릭 그리피스의 놀라운 발견을 파고들어 그 혁명적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피스의 '형질전환 인자'
1928년 영국 보건부에서 일하던 런던의 의사 그리피스는 대부분의 폐렴을 일으키는 세균 폐렴균으로 실험했다. 폐렴균은 두 형태로 존재한다. 매끄러운 형태는 겉이 매끄럽고 병원성이 있으며, 거친 형태는 병원성이 없다. 그리피스는 병원성 폐렴균을 열로 먼저 죽인 다음 비병원성 폐렴균과 섞어 쥐에 주사했다. 놀랍게도 그 혼합물은 이틀 만에 폐렴을 일으켜 일부 쥐를 죽였다. 요컨대 죽은 세균의 한 균주가 어떤 물질을 통해 병원성 없는 다른 균주를 변환시켰다. 그리피스는 그것을 '형질전환 인자(transforming principle)'라 불렀다. 이 과정은 영구적이었고 유전되었다.
그리피스의 '형질전환 인자'는 무엇이었나.
원서 제1장, 두 줄로 놓인 문답
DNA였다.
에이버리와 동료들이 그것을 DNA로 동정해 보고한 것이 1944년이다. 그전까지 유전자는 단백질로 되어 있다고 보편적으로 믿어졌다. 복잡한 구조로 특이성을 줄 수 있으니까. 단백질의 구성단위인 20종 아미노산이라면, 핵산의 구성단위 네 개보다 유전 효과를 낼 만한 복잡성을 훨씬 많이 준다는 논리였다. 넷은 너무 적었다. 그 방대한 유전 정보를 담기에는. 1936년 웬델 스탠리는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의 활성 성분이 단백질이라고 잘못 주장했고, 10년 뒤 노벨위원회는 그 틀린 결과에 상을 주어 또 하나의 오심을 남겼다.
1944년의 세계는 2차 대전의 참화에 삼켜져 있었다. 실제로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독일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15년이 넘는 시간과 치밀하게 설계된 일련의 실험 끝에, 에이버리와 두 대학원생은 스스로도 놀란 것을 발견한다. 그리피스의 형질전환 인자는 DNA였다.
세 사람은 병원성 폐렴균에서 추출한 DNA를 꼼꼼히 정제하는 것으로 실험을 시작했다. 고도로 정제한 DNA를 무해한 균과 섞어 쥐에 주사하자 폐렴이 즉시 따라왔다. 따라서 DNA가 형질전환에 관여하는 활성 분자이고, DNA의 기능은 유전 정보의 저장소라는 것이다. 유전자가 실제로 DNA로 되어 있다는 최초의 증거였고, 20세기의 돌파적 발견 중 하나로 널리 평가된다.
그런데 1944년의 발표는 조심스러웠고, 열광과 의심과 당혹이 섞인 반응을 받았다. 심지어 발견자들 자신에게도 그랬다. DNA 전문가였던 동료 앨프리드 머스키는 에이버리의 DNA 시료에 미량의 단백질이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는 에이버리의 다른 여러 실험 데이터를 고의적으로, 그리고 편하게 무시했다. 600만분의 1로 희석해도 형질전환이 일어났으니 오염물이 원인일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는데도 그랬다.
프랑스의 앙드레 부아뱅이 대장균에서 뒷받침하는 증거를 곧 내놓았다. 1952년 미국의 미생물학자 앨프리드 허시(1969년 노벨상)와 기술원 마사 체이스가 절묘한 '블렌더 실험'으로 DNA가 유전물질임을 굳혔다. 세균 바이러스의 DNA와 단백질에 각각 인-32 방사성 표지를 붙여, 단백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DNA만이 새 박테리오파지의 복제를 지시함을 보였다. 1956년에는 머스키조차 에이버리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왜 상은 오지 않았나
에이버리가 그리피스의 형질전환 인자를 DNA로 밝힌 것은 현대 생물학 전체를 바꾸었다. 그런데 노벨위원회는 20세기 최대의 생물학적 발견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마흔 번 넘게 후보로 지명되었다. 원저자는 그 이유를 네 겹으로 벗겨 놓는다.
- 한 사람의 완강한 반대. 열쇠를 쥔 사람은 스톡홀름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화학 교수 에이나르 함마르스텐이었다. 머스키처럼 그도 수십 년간 DNA를 연구했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 에이버리가 그만큼 순수한 DNA를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데이터가 반대를 말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수상 거부나 연기를 완강하게 권했고 위원회는 매번 그 권고를 받아들였다. 다른 대륙 다른 나라의 완전한 이방인 하나를 위해, 늘 얼굴을 마주하는 동료이자 동향 사람을 격노하게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 과거의 오심이 남긴 트라우마. 위원회는 앞선 수십 년 동안 몇 번의 노골적인 실수를 했다. 하나는 벌레를 암의 기원으로 지목한 1926년의 피비게르, 다른 하나는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의 활성물질을 단백질로 지정한 1946년의 스탠리였다. 신중함이 지나쳐 관성이 되었다.
- 에이버리 자신의 실수. 1917년 그는 폐렴균 형별 특이 항원의 면역학적 결정기가 '단백질성'이라고 주장했으나, 훗날 자신의 연구가 그것이 다당류임을 드러냈다. 1930년대에는 항혈구면역(antiblastic immunity)이 폐렴균 감염의 원인이라고 잘못 보고했고 반대 증거 앞에서도 신념을 바꾸기를 거부했다. 이 두 실패가 그의 신뢰도에 오래 남는 흠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스웨덴이라는 작은 나라가 어느 시점에나 전 세계 최고의 과학을 감별할 만큼 충분한 과학자를 배출하는 일은, 아마 지금도 어려운 과제다.
- 성격. 마지막 이유는, 마지막이라 해서 가벼운 이유가 아니다. 의사-과학자였던 에이버리는 자기 발견에 대해 폭넓은 주장을 내놓는 일을 극도로 삼갔다. 그는 극심한 내향성과 학회 혐오로 유명했다. 세상을 설득하지 않은 사람에게 공로는 오지 않는다. 오슬러의 말이 여기서 다시 울린다.
에이버리는 1955년 78세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발견이 널리 인정받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이었다.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상을 받았을 것이다.
에이버리가 DNA를 유전물질로 드러낸 데 어느 정도 밀려, 전후 유럽과 미국의 연구 물결이 DNA의 구조와 기능으로 수렴했다. 그 노력의 정점이 DNA 분자의 정확한 구조를 푸는 일이었다. 실제로 제임스 왓슨은 에이버리의 논문에 처음 자극을 받아 DNA 연구에 뛰어들기로 했다.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모은 X선 결정학 데이터의 도움으로 그들은 1953년 이중나선 구조를 해독했다.
1.4.4로절린드 프랭클린과 이중나선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오늘날 고등학생도 안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에 풀었다는 것. 그러나 실상은 그보다 복잡하고 훨씬 미묘하다. 그들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모은 결정적 실험 데이터에 크게 의존해 그 발견을 했다.
1.4.4.1 · 프랭클린과 윌킨스
런던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프랭클린의 아버지는 상업은행가였다. 1938년 케임브리지에 진학해 4학년 연구를 로널드 노리시(1967년 노벨상, 라디칼 화학과 광화학) 아래에서 했으나 둘은 잘 맞지 않았다. 대학원에서는 석탄의 물리학을 연구해 1945년 박사가 되고, 이어 파리에서 4년간 최신 X선 회절 기법으로 흑연과 탄소를 연구했다. 평생의 프랑스 애호가였던 그에게 파리의 4년은 생애 최고의 시간이었다.
1951년 초 프랭클린은 런던 킹스칼리지 물리학과 생물물리학부에 자리를 얻는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숙적 모리스 윌킨스를 처음 만난다.
윌킨스는 뉴질랜드 출생이지만 1940년 케임브리지에 진학했다. 역설적으로 재학 기간이 프랭클린과 일부 겹치는데도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케임브리지 성적이 나빴음에도 버밍엄대학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젊은 교수 존 랜들의 지도로 레이더 화면의 화질을 개선하는 발광 연구를 했다. 1941년 박사를 받은 뒤 버클리로 가서 어니스트 로런스의 사이클로트론 실험실에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위한 우라늄 증발을 연구했다.
전후 윌킨스는 상사 랜들을 따라 세인트앤드루스로, 이어 런던 킹스칼리지로 옮겨 생물물리학부 부소장이 되었다. 이 부서는 랜들이 세워 이끌고 의학연구위원회(MRC)가 지원했다. 윌킨스는 에이버리의 형질전환 인자가 힘을 얻기 시작한 1950년 무렵부터 DNA 구조를 본격적으로 조사했다.
1950년 5월 런던의 한 학회에서 그는 베른대학의 스위스 생화학자 루돌프 지그너에게 이례적으로 온전한 DNA 시료를 청해 받았다. 송아지 흉선에서 만든 지그너의 시료는 가느다란 섬유였고, 윌킨스는 그것으로 길고 끊기지 않은 표본을 만들었다. 그의 대학원생 고슬링 레이먼드가 습윤 환경에서 이전의 어떤 것보다 우수한 X선 회절 사진 몇 장을 얻었다. 이것이 DNA 구조 해명이라는 사업에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기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진도 구조를 밝히는 데 필요한 통찰을 주기엔 아직 부족했다. 랜들은 연구를 가속하기 위해 진짜 전문 X선 결정학자를 데려오기로 했다. 그렇게 1951년 1월 프랭클린이 생물물리학부에 합류했다.
프랭클린과 윌킨스의 첫 대면은 쓰디쓰고 신랄한 관계를 예고했다. 두 사람은 즉각, 상호적으로 서로를 싫어했다. 프랭클린은 늘 자기 생각을 말하는 강한 여성이었고 어리석음을 참아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윌킨스는 수줍고 내향적이었으며 특히 여성에게 그랬다. 두 사람이 소원했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 적대적이었고 때로는 능동적으로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성격의 충돌은 설명할 수가 없다.”
존 랜들, 여러 해 뒤의 회고
그때 두 사람은 몰랐다. 그들의 적의가 DNA 구조를 푸는 그들 자신의 탐구에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물려받은 대학원생 고슬링과 함께 프랭클린은 지그너의 시료에서 두 형태를 얻었다. 상대습도 75% 정도의 A형은 혼란스러운 회절 사진을 주었다. 사실 이전의 대부분 X선 사진도 비슷한 시료의 흐릿한 무늬였다. 그러나 상대습도 92% 이상의 B형은, DNA 시료를 넣은 챔버에 수소 가스를 넣자는 프랭클린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B형을 '습윤형'이라 불렀고, 그것이 1952년 5월 말 51번 사진에 선명하고 초점 맞은 무늬를 남겼다.
프랭클린의 B형 51번 사진은 고품질 X선 회절 무늬로 2회 대칭과 나선의 십자형 반사를 명확히 보여 주었다. 나아가 그는 패터슨 계산법과 자기 실험 데이터에서 도출한 정확한 수분 함량을 써서 당-인산 기가 DNA 분자의 바깥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프랭클린은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기까지 연역 두 걸음을 남긴 지점에 있었다. 그때 윌킨스 같은 누군가와 토론하고 서로를 자극할 수 있었다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과학사에서 두 과학자 사이의 개인적 반감이 이만큼 결과에 영향을 준 예는 드물다. 유감스럽게도 프랭클린이 킹스에 있던 27개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과학적 교류가 거의, 있었다 해도 미미하게 있었다.
1.4.4.2 · 왓슨과 크릭
극명한 대조로,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도시 하나를 건너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같은 문제를 풀고 있던 두 젊은 남자 왓슨과 크릭 사이에는 소통의 장벽이 없었다.
왓슨은 스물다섯의 미국인 박사후연구원으로, 1949년 인디애나대학에서 이탈리아 미생물학자 살바도르 루리아(1969년 노벨상) 아래 바이러스 유전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크릭은 이미 서른다섯이었지만 아직 오스트리아인 막스 페루츠(1962년 노벨상)의 지도로 X선 결정학을 써서 헤모글로빈 구조를 다루는 박사 과정 연구를 하고 있었다. 프랭클린과 윌킨스의 절연과 달리, 왓슨과 크릭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도전하고 자극하고 영감을 주었다.
1953년 1월, 윌킨스는 프랭클린의 허락 없이 왓슨에게 프랭클린이 찍은 51번 사진을 보여 주었다. B형의 X선 회절 무늬였다. 왓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늬의 단순함과 압도적인 검은 십자가 나선 구조를 강력히 시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DNA가 세 가닥이 아니라 두 가닥일 수 있음도 함축했다. 프랭클린의 결정적 실험 데이터를 적용해 왓슨과 크릭은 1953년 2월 DNA 분자의 정확하고 아름다운 이중나선 구조를 빠르게 세웠다.
거기에 세 사람의 지식이 더 얹혔다.
- 어윈 샤가프. 1950년 컬럼비아대학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태생 미국 생화학자 샤가프가 두 쌍 염기의 1:1 비를 정확히 측정했다. 아데닌(A)이 티민(T)과 같은 양, 시토신(C)이 구아닌(G)과 같은 양으로 존재한다는 샤가프의 규칙이다. 그런데 샤가프 자신은 그 1:1 비가 갖는 의미를 밝히지 못했고, 왓슨과 크릭이 그것을 염기 짝짓기의 결과로 훌륭하게 직관했다. 원저자의 정리는 날카롭다. 샤가프의 규칙이 이중나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중나선 모형이 그 규칙을 만들었다.
- 라이너스 폴링. 1951년 칼텍의 폴링(1954년 화학상, 1962년 평화상 단독 수상자)이 단백질 α-나선 논문을 냈다. 당대 최고의 화학자로 세계가 떠받들었다. 그도 1953년 초 논문으로 DNA 구조에 손을 댔으나, 염기가 바깥에 있고 당-인산 골격이 중심에 오는 삼중나선을 만드는 실수를 했다. 나선이 하나 더 필요했던 이유는 DNA 시료의 수분 함량을 과소평가한 데 있었다. 프랭클린의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중나선에 성공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지구상에서 노벨상을 세 번 받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 제리 도너휴. 방문 중이던 미국 결정학자이자 폴링의 제자로, 우연히 왓슨과 크릭과 같은 사무실을 썼다. 네 번째 동료는 폴링의 아들 피터였는데, 그는 캐번디시 대학원생이면서 케임브리지의 진척을 패서디나에 알리고 그 반대로도 전하는 '이중간첩' 노릇을 겸했다. 1940년대 초부터 폴링과 일한 도너휴는 수소결합의 세계적 전문가였다. 왓슨이 네 염기의 에놀형으로 분자 모형을 만들며 실패하고 있을 때, 도너휴는 즉각 지적했다. 당시 많은 교과서에 잘못 그려진 것과 달리 네 염기는 토토머로서 에놀형이 아니라 케토형을 취한다는 것이다. 왓슨과 크릭에게는 또 한 번의 유레카였다.
1953년 2월 28일, 두 사람은 마침내 모든 조각을 맞췄다. 단 한 번의 습식 실험도 하지 않고 모형만으로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세운 것이다.
1953년 4월 25일 두 사람은 DNA 구조에 관한 획기적 논문을 『Nature』에 의기양양하게 발표했다. 지금은 상징이 된 이중나선 그림은 화가였던 크릭의 아내가 그렸다. 그들은 이 구조가 유전물질이 어떻게 복제되고 전달되는지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는 점까지 적어 두었다.
“우리가 제안한 특이적 짝짓기가 유전물질의 복제 기구를 곧바로 시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않았다.”
왓슨 & 크릭, Nature 171, 737–738 (1953)
감사의 말에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또한 런던 킹스칼리지의 M. H. F. 윌킨스 박사, R. E. 프랭클린 박사와 그 동료들의 미발표 실험 결과와 아이디어의 일반적 성격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이 한 문장이 이후 반세기의 논쟁을 낳는다.
1.4.4.3 · 이중나선 이후
9년 뒤 1962년, 왓슨·크릭·윌킨스가 DNA 구조 발견으로 노벨상을 공유했다. 20세기 생물학 최대의 진전으로 널리 평가되는 업적이다. 윌킨스가 포함된 것은 주로 이중나선이 확립된 이후에 그가 한 일 때문이었다. 왓슨과 크릭, 특히 왓슨은 이중나선의 타당성을 여전히 걱정했다. 윌킨스와 킹스칼리지의 동료들은 프랭클린의 실험을 더 선명하게 반복하고 방대한 실험적 증거를 모아 이중나선이 본질적으로 옳음을 증명하고 세부를 정교화했다.
슬프게도 프랭클린은 1958년, 서른일곱이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살아 있었다면 그는 윌킨스보다 확실히 우선순위를 가졌을 것이다.
1962년의 상은 이 서사시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샤가프는 DNA의 '샤가프 규칙'을 밝힌 공로로 자신도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한 데 환멸을 느낀 그는 급기야 과학 자체를 규탄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왓슨과 크릭이 자신의 측정값의 의미를 낚아채 간 방식을 지독히 원망한 그는 이중나선 구조를 믿기를 거부했고, 분자생물학에 대한 통렬한 증오를 남은 생애 25년 동안 널리 퍼뜨렸다.
1967년 하버드에서 일하던 왓슨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책 『이중나선: DNA 구조 발견의 개인적 기록』을 썼다. 자기 과시가 어찌나 심했던지 발견에 관여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짐의 논픽션 소설'이라 불렀다. 초고를 읽은 크릭·윌킨스·폴링과 프랭클린 가족 등 관계자 전원이 격노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하버드대학 출판부에 격렬히 항의해 출간을 막으려 했다. 크릭은 왓슨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당신의 사진 모음을 본 어느 정신과 의사는, 그것이 여성을 증오하는 남자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금 그 책을 낸다면, 역사가 당신을 규탄할 것이다.”
프랜시스 크릭이 제임스 왓슨에게
그럼에도 『이중나선』은 1968년 아테나이움 출판사에서 나왔다. 즉각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100만 부 이상 팔렸다. 과학과 과학자에 관해 가장 널리 읽힌 책 중 하나다.
왓슨의 논쟁적인 책은 미국의 작가이자 변호사인 앤 세이어가 1975년 전투적인 반박서 『로절린드 프랭클린과 DNA』를 쓰게 만들었다. 프랭클린의 친구였던 세이어는 열정적이고 종종 변호사다운 책을 써서 프랭클린을 가장 저명한 여성 과학자이자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밀어 올렸다. 조금 역설적인 일이다. 프랭클린은 늘 '여성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자'로 대우받기를 원했으므로. 일부 전문가에게 과학적으로 얕다고 평가된 세이어의 책은 왓슨을 여성혐오자이자 프랭클린의 데이터를 훔쳐 성공한 악당으로, 윌킨스를 여성 과학자를 경멸한 인물로 그렸다. 그러나 흔히 그렇듯 진실은 왓슨과 세이어가 각각 그려 낸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
1988년 크릭은 자서전 『무엇을 미친 추구라 하는가: 과학적 발견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냈다. 같은 1988년, 새로 나온 주사터널링전자현미경이 처음으로 DNA 구조를 '시각화'했다. 그것은 과연 이중나선이었다. 2003년 윌킨스도 자서전 『이중나선의 세 번째 사나이』를 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DNA의 서사시에는 먼지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1977년 왓슨은 하버드를 떠나 '미국 유전학의 정서적 고향'이라 불리는 롱아일랜드의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를 이끌러 갔다. 1990년대 초에는 인간유전체계획을 지휘했다. 그리고 콜드스프링하버의 수장으로 50년을 보낸 뒤, 2019년 1월 PBS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며 해임되었다. 아프리카인이 유럽인보다 지능이 낮다는 자신의 과거 발언을 철회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크릭도 생애 어느 시점에 비슷한 견해를 가졌으나, 다행히 공개적으로 말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을 둘러싼 인간적 취약함이 어떠했든,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에서 가장 심원하고 결과가 큰 발견이었다. DNA의 변형으로 생기는 병인 암의 발생을 해독하는 문제에서는 특히 그렇다.
1.4.5비숍과 바머스의 원종양유전자
상징이 된 라우스 사르코마 바이러스는 그야말로 주고 또 주는 선물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라우스 자신은 노년에 이르러, 자기 바이러스가 결국 풀어내는 데 기여한 암의 유전적 기원에 대한 반대자가 되었다.
1911년 라우스의 발견에서 시작한 여러 돌파의 합류가 최초의 종양유전자 src — 사르코마에서 온 이름 — 의 발견으로 귀결했다. 종양유전자란 이름 그대로 정상 유전자의 돌연변이에서 생긴,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다.
이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분야는 거의 50년간 잠들어 있었다. 1958년 칼텍의 해리 루빈이 세포 배양에서 바이러스를 정확히 정량할 수 있는 포커스 분석법을 개발하며 동면에서 깨어난다. 1965년 버클리의 두스베르크가 비교적 큰 RNA를 온전히 분리해 좋은 의미의 명성을 얻었다.
애석하게도 두스베르크는 1980년대 에이즈 유행기에 부정론으로 악명을 얻었다. 그는 HIV가 에이즈의 원인임을 믿기를 거부하고 항레트로바이러스제가 환자를 독살한다고 주장했다. 이 오스트리아계 미국 과학자의 반과학적 입장은, 그가 대통령 자문을 맡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많은 에이즈 환자의 목숨을 앗아 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장에는 이런 대목이 반복된다. 뛰어난 발견자가 그 뒤에 어떻게 무너지는가. 저자는 그 이름을 지우지 않고 함께 적어 둔다. 역사가 교사라면 이런 부분이야말로 교재다.
1970년 버클리 루빈 연구실의 대학원생 스티븐 마틴이 종양유전자 src의 온도민감 돌연변이를 발견했다고 발표한다. 뉴햄프셔 틸턴의 동물세포·바이러스 고든 회의에서 그는 라우스 사르코마 바이러스가 정상 세포를 암세포로 형질전환시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35°C(허용 온도)에서는 암 형질전환을 유도하지만 42°C(비허용 온도)에서는 그러지 않는 돌연변이 바이러스를 분리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자손 바이러스의 생산은 온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이 돌연변이 종양유전자를 바이러스성 src라 불렀다.
마틴의 결과는 특별했다. 더 주목할 것은 그가 지도교수 루빈의 직접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실험을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루빈은 분자생물학 일반, 특히 프로바이러스 개념에 강한 경멸을 품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틴의 발견의 의미를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콜로라도대학 보건과학센터의 레이먼드 에릭슨은 그것이 당시 암 연구에서 가장 흥분되는 생각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src가 암호화하는 단백질을 분리하기 위해 집요하게 매달렸다. 6년간 논문 한 편 없이. 1977년 에릭슨과 박사후연구원 조안 브루게는 src 종양유전자가 src 종양단백질을 암호화하며 그것이 단백질 인산화효소임을 발견한다.
인산화효소(kinase)는 ATP의 인산기를 단백질의 아미노산으로 옮기는 것을 돕는 효소다. 1980년 솔크 연구소의 토니 헌터는 src 종양단백질이 티로신 인산화효소임을 확립했다.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인산화효소는 세린과 트레오닌 인산화효소이고, 티로신 인산화효소는 전체의 1~2%에 불과하다. 이 사실이 훗날 표적항암제 시대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모든 발견이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도 심원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은 1976년에 일어났다. J. 마이클 비숍과 해럴드 E. 바머스가 그 종양유전자라던 src가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 세포에도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 그것은 모든 척추동물의 세포에 수십억 년 동안 존재해 온 정상 유전자였다. 이 발견이 종양유전자 연구의 폭발을 촉발했다.
바머스의 조부모는 미국으로 이주한 가난한 유럽인이었으나 부모는 각각 하버드와 웰즐리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의사인 아버지가 의사가 되라고 압박했지만 바머스는 문학에 빠져 하버드를 마다하고 애머스트 칼리지에 가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유기화학 성적이 어찌나 나빴던지(가까스로 C) 교수가 그에게 수업에서 나가 달라고 했다. 유기화학은 의사·약사·치과의사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지금도 주요한 장애물이다.
1961년 졸업 후 그는 하버드 영문학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버드 의대 친구들과 생물학의 열기(그 해 니런버그와 오초아가 유전 코드를 막 풀었다)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영문학 석사를 들고 하버드를 떠나 컬럼비아 의대에 입학한다. 많은 지식인처럼 베트남전에 열렬히 반대했던 그는 1968년 징병 대신 '옐로 베레'로 NIH에 들어갔다. 훗날의 협력자 마이클 비숍도 또 하나의 옐로 베레였다.
1970년 바머스는 UCSF 비숍 연구실의 박사후연구원으로 갔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15년에 걸친 풍요로운 협업 속에서 동등한 관계로 진화했다. 물론 두 사람을 강하게 묶은 것은 암 바이러스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러나 그 결속을 더 단단히 벼려 낸 것은 말과 언어에 대한 서로의 사랑이었다. 영문학 석사가 종양유전자를 찾아낸 이야기다.
단일 인간 세포에는 대략 5만 개의 유전자가 존재한다. 돌연변이된 하나를 찾는 일은 문자 그대로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기다. 두 사람이 고안한 영리한 기법 하나가 DNA 교잡(hybridization) 프로브를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컬럼비아대학의 솔 스피겔먼이 개발한 방법이다. 스피겔먼 교잡법은 풀어진 두 DNA 가닥을 다시 결합시킨다. 두 가닥의 성공적인 결합은 쉽지 않고 정밀한 온도와 염 농도를 요구한다.
바머스와 비숍의 절묘한 착상은 역전사효소를 이용해 방사성 표지 프로브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이러니의 뒤틀림이 하나 있다. 비숍은 1969년 스스로 역전사효소를 발견하기 직전까지 갔으나 선배 동료의 조언에 따라 그 과제를 조기에 접었다.
방사성 프로브를 만드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하나의 유전자를 대표하는 프로브를 개발하고 최적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73년 가을, 프로브 작업을 하던 박사후연구원이 더 유망해 보이는 다른 과제로 옮기며 포기했다. 비숍 연구실을 방문 중이던 프랑스 과학자 도미니크 스테엘린이 떠나는 연구원에게서 src 프로브 과제를 인수했다. 6개월 뒤 그는 충분한 양과 순도의 방사성 src 프로브를 만들어 냈다.
이 프로브로 분자 교잡 실험을 해 라우스 사르코마 바이러스에서 src 관련 DNA의 증거를 찾았다. 당연히 찾았다. 놀랄 일이 아니다. 애초에 찾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에 왔다.
품질 관리와 실사의 일부로, 스테엘린은 같은 src 프로브로 정상 닭 세포를 분자 교잡 시험했다. 바이러스성 src 관련 DNA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으니 기준선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1974년 10월 어느 토요일 밤, 스테엘린은 정상 닭 세포에서 src 핵산 서열을 발견한다. 그 DNA는 src 종양유전자에 특이적인 DNA 프로브에 상보적이었다. 정상 닭 세포가 src 유전자를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X선 필름을 보는 것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짜릿한 경험이었다.
함의는 명확했다. 바이러스성 src 프로브는 정상 세포의 src DNA와 동일하거나 거의 동일하며, 따라서 src 유전자는 감염된 세포와 감염되지 않은 세포 모두에 존재한다. 정상 닭 세포는 라우스 사르코마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훨씬 전부터 최소한 한 벌의 src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흥분한 그들은 동물의 범위를 넓혀 날지 못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에뮤, 레아, 다른 여러 새, 새크라멘토 동물원의 포유류까지 검사한 모든 동물에서 src 유전자를 찾았다. 함의는 분명했다. 세포성 src 같은 세포 유전자의 변화가 레트로바이러스의 개입 없이도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어디를 보아도 종양유전자는 거기 있었다. 마침내 세포성 src는 인간을 포함한 다른 종에서도 서열 상동체를 갖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때 바머스와 비숍은 세포성 src를 원종양유전자(proto-oncogene)로 명명한다. 바이러스에 포획되거나 돌연변이를 통해 종양유전자가 될 잠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과가 너무나 혁명적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실험 결과의 타당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1976년 『Nature』에 논문을 냈다. 스테엘린이 제1저자이자 교신저자였다. 세포가 발암 잠재력을 가진 유전자를 품고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입증되었다. 1978년까지 비숍과 바머스는 헌터의 발견, 즉 src 단백질이 조절 단백질인 티로신 인산화효소라는 것을 확증했다. 더욱이 바이러스성 src 단백질은 세포성 src 단백질보다 티로신 잔기에 인산을 훨씬 효율적으로 붙였다.
이 발견은 분야를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1989년 비숍과 바머스는 레트로바이러스 종양유전자의 세포 기원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모든 세포의 정상 유전자가 교란되면 암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인 공로다.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
스테엘린은 수상자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바머스와 비숍에게 상을 반납해 항의하자고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가, 노벨상을 자발적으로 반납하는 사람은 없다 — 결국 노벨위원회에 직접 편지를 써서 “결정적 실험을 수행한 바로 그 사람을 제외한” 부당함을 저질렀다고 항의했다.
위원회는 물러서지 않고 자기 입장을 지켰다. 정당하게도 그랬다. 일부 위원은 스테엘린이 UCSF 재직 전후로 주목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사석에서 지적했다. 그때부터 원한을 품은 스테엘린은 학회에서 바머스와 비숍을 만나면 늘 등을 돌렸다.
두스베르크도 유쾌하지 않았다. RNA 분자를 작은 조각으로 쪼개 X선 필름으로 지도화하는 그의 절차는 src 분야가 초기에 시동을 거는 데 결정적이었다. src 문제의 해결로 이어지는 초석을 자기가 놓았다고 그는 저평가되었다고 느꼈다. 점점 불만이 커진 그는 종양유전자와 원종양유전자를 아예 부정하고, 대신 염색체 불균형을 암의 원인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뭔가를 짚었을 수도 있다. 염색체 불안정성은 암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종양학계의 관심을 점점 더 끌고 있다. 예컨대 KIF18A 억제제가 잠재적 항암 치료로 활발히 탐색되고 있고, 미세소관 억제제, DNA 손상 체크포인트 억제제, 불안정성을 회복시키는 억제제(EZH2 등)가 모두 염색체 불안정성과 연관된다. 부정론자의 원한이 우연히 옳은 방향을 가리키는 일도 과학에서는 생긴다.
종양유전자는 금맥임이 입증되었다. src는 수많은 세포성 종양유전자 중 첫째일 뿐이었다. 비숍과 바머스가 개발한 방법론으로 ras, myc, HER2/neu, abl, erbB, yap, pi3k를 비롯해 서른 개 넘는 종양유전자가 발굴되었다. 나아가 많은 원종양유전자가 돌연변이를 겪으면 정상 세포를 암세포로, 인간 암을 포함해 전환시키는 데 기여함이 밝혀졌다.
역설적으로, src 종양유전자가 세포생물학 일반과 암에 미친 영향이 지대함에도 src 자체는 인간의 발암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그 결정적 역할은 다른 종양유전자에게, 특히 MIT의 로버트 와인버그가 발견한 ras에게 돌아갔다.
1.4.6로버트 와인버그의 ras
ras는 암에서 가장 빈번히 돌연변이되는 종양유전자이며 발암의 결정적 동력이다. 이 이름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쥐 육종(RAS, rat sarcoma)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었다. 수십 년 전의 분자생물학 연구가 이제 금맥을 쳤다. KRAS 돌연변이 G12C를 표적하는 약 두 개가 2022년 FDA 승인을 받았고, ras 종양유전자 돌연변이를 이용하는 훨씬 많은 약이 임상시험 중이다.
돌아보면 라우스 사르코마 바이러스에서 src 유전자를 찾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그 바이러스에는 유전자가 넷뿐이니까. 그러나 암세포에서, 아니 그냥 정상 세포에서 유전자를 하나 짚어 내는 일은 지수적으로 더 어렵다. 인간 세포에는 2만 개 넘는 유전자가 있다. 그래서 바머스와 비숍은 방사성 프로브를 미끼로 써서 유전자 수프에서 src를 낚아야 했다. 그런데 미끼가 없으면 어떻게 고기를 잡나? 새 종양유전자를 발견하려면 수천 개의 정상 유전자에서 종양유전자를 식별하고 분리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했다. 와인버그가 바로 그 일을 위해 절묘한 유전자 전달 기법을 개발했다.
1.4.6.1 · ras의 전주
ras 종양유전자는 1970년대 중반에 동정·분리되었지만, ras 연구의 시작은 1960년대 쥐 백혈병 바이러스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비와 키르스텐은 모두 ras 백혈병 바이러스가 일부 쥐에서 육종을 일으킬 수 있으나 마우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관찰했다.
ras 유전자가 큰 관심을 끈 이유는 인간 암에서 그토록 빈번히 돌연변이되기 때문이다. ras 연구 분야의 창시자로 꼽히는 NCI의 에드워드 스콜닉이 1975년 하비 또는 키르스텐 쥐 사르코마 바이러스에서 마우스 ras 종양유전자를 처음 분리·동정했다. 그는 1982년 머크로 옮겨 1985년부터 2002년까지 이 거대 제약사의 연구개발 총괄을 맡았다. 머크는 로이 바겔로스의 성공 이래 미국 최고의 의학 연구자를 R&D 수장으로 앉히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바겔로스는 1970년대 중반부터 20년간 회사를 이끌어 머크를 세계 최고의 제약사로 만들었다.
바머스와 비숍이 방사성 src 프로브로 성공한 뒤, 이 분야의 많은 과학자에게 비바이러스성 종양에서 세포 DNA를 전달해 형질전환 유전자를 검출하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보였다. 돌파는 1981년경 화학 발암물질로 유도한 마우스 종양을 사용한 와인버그 그룹이 처음 이루었다. 와인버그의 성공은 이후 5년간 DNA 형질도입으로 종양유전자를 연구하는 홍수를 불러왔다. 그런 성과를 내려면 유전자 전달 기법의 최적화가 결정적이었다.
1.4.6.2 · 유전자 전달
와인버그의 부모는 나치 독일에서 피츠버그로 피난했다. 와인버그는 MIT에서 학사와 박사를 모두 바이러스 연구로 받았고, 거기서 훗날의 동료이자 친구, 1975년 노벨상 수상자가 되는 데이비드 볼티모어와 친교를 맺었다. 몇 그룹에서 박사후연구를 한 뒤 1972년 MIT로 돌아와 볼티모어와 2년간 일하다 독립 연구를 시작했다. 스스로 헤엄치거나 가라앉는 자리였다.
1975년경 와인버그 그룹은 흥미로운 발견을 내기 시작한다. 첫 돌파가 유전자 전달, 다른 말로 DNA 형질도입 혹은 종양유전자 형질도입이었다.
마우스 백혈병 바이러스의 DNA 구조를 규명한 뒤 그는 그 DNA 분자들의 기능을 탐색하고 싶었다. 첫 대학원생 데이비드 스모트킨이 두 네덜란드 과학자가 개발한 절차로 암을 일으키는 DNA 조각을 정상 세포에 전달해 보자고 제안했다. 1973년 프랑크 그레이엄과 알렉스 판 데르 에브는 인산칼슘이 아데노바이러스를 세포 안으로 실어 넣는 데 특히 효율적임을 발견했다. 그레이엄–판 데르 에브 프로토콜은 아데노바이러스가 세포를 뚫는 것을 돕는 데 이전 방법보다 100배쯤 효율적이었다. 오늘날 이 인산칼슘 요령은 전 세계 실험실에서 보편적으로 쓰인다.
와인버그는 이 프로토콜이 DNA에는 결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데노바이러스는 별개의 문제고 정제된 DNA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아데노바이러스는 스스로 세포막을 통과하는 DNA 바이러스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먼저 ACE 수용체라 불리는 세포 표면 수용체에 결합해 정상 세포를 손쉽게 감염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DNA 조각을 세포에 넣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나 와인버그는 해 봐서 나쁠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스모트킨은 다른 과제들이 어차피 잘 되지 않던 터라 박사학위를 받기 위한 절박함에서 이를 시도했다. 그레이엄–판 데르 에브의 조리법을 따라 마우스 레트로바이러스로 작업했다. 추출과 정제 뒤 제한효소를 DNA 가위로 삼아 결과 DNA 시료를 수천 조각으로 잘랐다. 각각 유전자 한두 개를 담은 조각들을 인산칼슘에 적셔 흰 입자를 만들었다. 결정화된 뒤 유전자로 코팅된 인산칼슘 입자는 윤활제처럼 작용해 페트리 접시에서 헤엄치는 정상 세포를 뚫고 들어갔다. 칼슘 2가 양이온이 세포의 DNA 흡수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칼슘–DNA 복합체가 다른 어떤 수단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세포막을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스모트킨은 형질도입 대상으로 비암성의 '정상으로 보이는' NIH 3T3 마우스 세포를 무작위로 골랐다. 그때 냉동고에 그 세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행운의 한 방이었다. 진짜 정상 세포였다면 페트리 접시에서 암이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진정한 정상 세포는 하나 이상의 종양유전자가 돌연변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뒤에 다시 문제가 된다.
흰 입자를 접시에 뿌린 뒤 그는 사람 체온의 배양기에 2주간 두었다. 그 무렵이면 특정 유전자가 정상 세포 안에서 자랐을 경우 '포커스'가 형성된다. 1950년대 중반 칼텍의 해리 루빈과 하워드 테민(1994년 노벨상)이 라우스 사르코마 바이러스를 위해 개발한 포커스 형성 기법이다. 와인버그의 기쁜 놀라움 속에 그들은 수많은 포커스를 보았다. DNA 형질도입이 기적처럼 통한 것이다.
1977년까지 스모트킨은 하비 사르코마 바이러스를 정상으로 보이는 세포에 형질도입해 암세포로 전환시켰다. 마우스 백혈병 바이러스에서 정제한 바이러스 DNA를 배양된 정상으로 보이는 세포에 형질도입하는 것도 해냈다. 그전까지는 온전한 바이러스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유전자 전달 전략은 한 세포에서 DNA(유전자)를 추출해 다른 세포에 도입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수용 세포에 도입된 유전자는 그 세포가 새로운 형질이나 행동을 갖게 만들 수 있다. 그런 반응은 새로 드러난 형질을 지정하는 정보가 공여 세포에 존재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정보는 DNA 분자의 전달로 수용 세포에 옮겨질 수 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모트킨은 기초연구를 떠나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었다. 종양유전자 형질도입 기법에 남긴 중요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살바도르 루리아는 종양유전자 형질도입을 와인버그가 이 분야에 남긴 가장 중요한 기여로 평가했다. 이 유전자 전달 기법으로 와인버그 그룹은 인간의 세포성 ras 유전자를 발견하러 나아간다.
1.4.6.3 · 인간 ras 종양유전자
1978년 2월, 눈 속에서 찰스강 다리를 건너 출근하던 와인버그에게 유레카의 순간이 왔다. 바머스와 비숍, 그리고 다른 이들이 발암 바이러스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바이러스를 그림에서 빼내고 싶었다. 대신 에임스의 “발암물질은 돌연변이원이다”라는 명제를 시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화학적으로 형질전환된 세포, 어쩌면 인간 종양 세포의 유전체 안에 있는 종양유전자를 정상 세포로 옮겨 보려는 것이었다.
스모트킨이 이미 졸업했으므로 횃불은 새 대학원생 미첼 골드파브에게 넘어갔다. 골드파브는 종양 세포에서 건강한 세포로 암 유전자를 옮기는 25번의 실험 중 단 한 번 성공했다. 그는 그것이 요행일까 두려웠다.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이유는, 더 다루기 쉬운 하비 사르코마 바이러스 형질도입 연구를 확장해 제때 졸업하고 싶었다는 데 있었다.
골드파브가 단호히 반대하니 와인버그는 발이 묶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손실은 다른 사람의 이득이다. 와인버그의 이득은 대만에서 온 4년차 대학원생 시자오 시의 형태로 왔다. 시는 첫 지도교수의 그룹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 와인버그가 훗날 능청스럽게 암시한 표현으로는 “…두 사람의 성격에 어떤 근본적인 화학적 부적합이 있었다.” 1979년 초 시는 와인버그 그룹으로 옮겼다.
“이 모든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하나의 전환점에 달려 있었다. 지도교수와 열망하는 박사과정 학생 사이의 파열된 관계.”
로버트 와인버그, Nature Cell Biology 13, 876 (2011)
첫 지도교수와 갓 충돌한 시로서는 두 번째 지도교수에게 또 반항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최소한 처음에는 와인버그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는 화학적으로 형질전환된 세포의 DNA를 형질도입하면 형질전환된 수용 세포가 나올 수 있다는 착상을 뒤따를 것을 반쯤 강요받았다. 걸린 판이 어찌나 크다고 느껴졌던지, 와인버그는 첫 '실험'을 자기가 직접 했다. 위스콘신대학의 찰스 하이델버거에게 전화를 걸어 세포 시료를 구한 것이다. 하이델버거의 연구실은 건강한 세포를 알려진 발암물질, 즉 콜타르에서 분리한 주요 발암 화학물질 3-메틸콜란트렌에 노출시켜 세포를 준비했다.
1979년, 그들은 3-메틸콜란트렌으로 암성 성장으로 전환된 세포를 가져다 정상으로 보이는 NIH 3T3 세포에 도입했다. 수용 세포 몇 개가 암성 성장으로 전환되었다. 요컨대 DNA가 활성 유전자를 옮긴 것이다. DNA가 실제로 화학 발암물질의 표적이며 유전자의 활성이 암세포의 악성 행동을 몰고 간다는 견해에 강한 힘이 실렸다. 에임스의 '발암물질 = 돌연변이원' 이론이 다시 옳다고 증명되었다.
몇 해에 걸쳐 방법을 채택하고 미세조정한 뒤 그들은 인간 종양유전자로 넘어갔다. 1980년 시는 하버드에 있던 대만 친구를 통해 인간 방광암 시료를 얻어, 거기서 인간 방광암 종양유전자를 분리하려 애썼다. 여러 달 뒤 실험이 실제로 통했다. 이 DNA를 '정상으로 보이는' 세포에 형질도입해 인간 방광암 세포에서 종양유전자를 검출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1981년 말, 시는 아홉 달의 씨름 끝에 그 종양유전자를 클로닝했다. 인간 종양유전자의 첫 형질도입을 성공시킨 사람이 그였으니 시적 정의로 보였다. 이어 와인버그는 음성 대조 실험의 일부로, 갓 들어온 1년차 대학원생에게 시가 클로닝한 인간 종양유전자가 레트로바이러스에서 분리된 종양유전자들과 상동성이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모두의 놀라움 속에, 그들의 인간 방광암 종양유전자는 몇 해 전 NCI의 스콜닉이 하비 쥐 사르코마 바이러스에서 분리한 ras 종양유전자와 매우 가까운 관계임이 드러났다.
레트로바이러스라는 붐비는 분야에서 벗어나려던 순간, 운명은 와인버그를 다시 레트로바이러스로 끌고 갔다. 벗어날 길이 없었다.
거의 동시에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의 마이클 위글러가 또 다른 세포주, 인간 방광 세포주에서 발암성 ras 종양유전자를 형질도입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NCI의 스페인 사람 마리아노 바르바시드도 비슷한 발견을 했다. 세 곳 모두 인간 ras 종양유전자가 화학적으로 형질전환된 세포와 인간 방광암 세포 모두에서 활성화되어 있음을 발견해, 특정 종양과의 연결을 만들었다. 와인버그는 이 성취를 “내 경력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감격해 표현했다. 와인버그, 위글러, 바르바시드의 작업이 항암 연구의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후 ras 종양유전자는 고양이, 쥐, 닭, 선충, 초파리에서 발견되었다. 위글러는 흔한 제빵용 효모의 DNA에서도 찾아냈다. 바머스와 비숍의 src에서 있었던 일의 데자뷔다. ras 유전자 역시 아주 오래된 계보를 갖고 있었다.
1.4.6.4 · 단 하나의 점돌연변이
모두가 ras 종양유전자라는 추측에 수렴하자 이제 경마가 시작되었다. ras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찾는 것. 정상 세포성 ras 유전자와 돌연변이된 암성 ras 유전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와인버그의 1년차 대학원생 랜디 치퍼필드가 1982년 초 종양유전자 돌연변이를 살펴보겠다고 요청해 배정받았다. 그는 과제를 시작하기 위해 많은 기법을 배워야 했고, 잘못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사정을 더 나쁘게 만든 일도 있었다. 같은 연구실 동료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여성이 그의 접근을 거절했다. 크게 낙심한 치퍼필드는 두 달 휴가를 떠났다. 돌아왔을 때 돌연변이 문제는 이미 풀려 있었다.
2년차 대학원생 클리퍼드 태빈이 치퍼필드가 떠나며 과제를 물려받았다. 정작 태빈은 벤치 실험을 스포츠만큼 좋아한 적이 없었다. 와인버그 연구실에서 그는 진핵 벡터로 쓸 수 있는 최초의 재조합 레트로바이러스, 몰로니 백혈병 바이러스를 구축했다.
와인버그는 NCI의 에스터 창과 협력했다. 창은 스콜닉 밑에서 박사후연구를 하며 정상 인간 ras 유전자를 클로닝했는데, 스콜닉 그룹을 떠나 같은 NCI의 더글러스 로우리 연구실로 옮길 때 그 클론들을 가져갔다. 정상형 인간 하비-ras 유전자 시료를 받는 대가로, 와인버그는 자기 클론 표본을 넘긴다는 그 한 가지 미덕만으로 창에게 시니어 저자 자리를 약속했다. 데이터 소유가 저자권으로 환산되던 시대의 풍경이다.
와인버그는 프로모터 영역이 돌연변이의 원인이라고 단호하게 확신했고, 태빈은 구조적 돌연변이에 판돈을 걸었다. 결과는 태빈이 옳았다.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똑똑해도, 과학에서는 언제나 데이터가 말하게 하는 편이 낫다.
원저자의 정리
태빈은 제한효소를 가위로, 리가아제를 풀로 삼아 정상 유전자와 암성 유전자의 잡종 클론을 만드는 '섞고 맞추기' 기법을 썼다. 네 개의 별개 DNA 조각을 하나로 융합하는 극도로 어려운 4중 결찰을 성공시켜 이름을 얻었다. 결국 350염기 구간까지 좁혔다. 남은 것은 돌연변이 지점을 찾는 일이었다. 와인버그는 재조합 유전자의 서열분석을 외주하기로 했다. 자기 그룹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NCI의 더글러스 로우리 연구실의 라비 다르에게 맡겼다. 뉴클레오타이드 서열분석의 전문가인 다르는 이미 하비와 키르스텐 사르코마 바이러스에서 분리한 두 바이러스성 ras 종양유전자를 클로닝하고 서열분석해 놓은 상태였다.
모두의 놀라움 속에, 발암성 ras 유전자와 건강한 세포성 ras 유전자(원종양유전자)는 단 하나의 뉴클레오타이드, 12번 코돈에서만 달랐다. 단일 점돌연변이였다.
참으로 놀라운 계시였다. 뒤지지 않으려 NCI의 바르바시드도 거의 같은 시기에 점돌연변이를 확정했다. 놀랍기는 했으나 선례가 없지는 않았다. 1949년 라이너스 폴링이 유전병 겸상적혈구빈혈을 연구하며, 그것이 11번 염색체에 있는 구형 단백질 헤모글로빈의 베타 사슬 유전자에서 단 하나의 뉴클레오타이드 돌연변이에서 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단일 점돌연변이가 매끄러운 원판 모양 적혈구를 낫 모양 세포로 바꾸는 유일한 원인이었다.
ras 종양유전자의 점돌연변이 발견은 『뉴욕타임스』 1면에 오를 만큼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1.4.6.5 · 두 번의 타격 모델
모두가 와인버그의 돌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하버드 의대의 존경받는 생물학자 루스 세이거는 와인버그가 NIH 3T3를 '정상' 세포로 쓴 데 문제를 제기했다. 이 마우스 세포주는 잘 봐야 '건강한' 세포로 볼 수 있을 뿐, 이미 수백만 번 분열한 것이다. 정상 세포보다 암세포에 뚜렷하게 더 가깝다. 따라서 와인버그는 '정상으로 보이는' 세포를 골라 반칙을 한 것이다. 원저자는 이 대목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사실 세이거가 100% 옳았다.
NIH 3T3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와인버그 그룹은 진짜 정상 세포로 쥐 배아 섬유아세포를 골랐다. 일차 조직에서 유래한 세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정상 세포는 ras 종양유전자를 형질도입해도 암화되지 않았다.
1983년 그들은 ras 유전자 하나 대신 종양유전자 두 개를 쓰기로 했다. 공범으로 고른 것은 비숍이 닭에서 발견한 새롭고 인기 있던 myc 유전자였다. 무작위 선택이 아니었다. ras 단백질은 세포질에 있고 myc 단백질은 핵에 있다. 두 유전자의 시너지, 즉 2-히트 모델이면 정상 세포를 암화시키기에 충분하리라는 추정이었다. 놀랍게도 실험은 통했다. 이중 형질도입된 세포를 쥐에 주사하니 큰 종양이 자랐다.
그 무렵 와인버그는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고 하나 뒤에 또 하나의 돌파가 나왔다. 그가 분자생물학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하나가 된 것은 놀랍지 않다. 1988년 작가 나탈리 앤지어는 종양유전자를 둘러싼 그의 활약을 다룬 찬사 어린 책 『자연스러운 강박』을 출간하며 자신 있게 예측했다. “…종양유전자로 노벨상이 나뉠 때 그는 거의 확실히 수상자가 될 것이다.”
종양유전자의 상은 그 이듬해 1989년에 나뉘었다. 오직 비숍과 바머스에게. 아마추어의 노벨상 예측이란 이런 것이다.
1.4.6.6 · 쇼캇의 갈고리
종양학에서 RAS 단백질이 갖는 중요성 때문에, 와인버그가 40년 전 ras 종양유전자를 발견한 이래 이 값진 표적의 저해제를 찾는 데 막대한 노력이 투입되었다. 그런데 이 분야 신약 개발의 첫 30년은 완전히 무익했다. RAS에는 저분자 저해제가 결합할 깊은 주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암젠의 화학자들은 RAS 단백질의 표면을 영화 「스타워즈」의 데스스타 표면에 비유했다. 수많은 암에 관여함에도 RAS가 수십 년간 '약을 만들 수 없는(undruggable)' 표적으로 여겨진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특히 KRAS는 가장 중요한 암 유전자 중 하나가 되었고, 췌장암의 거의 모든 사례에서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다. 이런 초기 관찰이 막대한 연구를 불러와 ras 유전자들과 그 발암 돌연변이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쌓았다.
최근 RAS 직접 저해제 일반, 특히 KRAS-G12C 저해제의 성공은 과학자의 창의성과 인내에 대한 증언이다. 돌파는 2013년 UCSF의 케반 쇼캇이 획기적 연구를 발표하며 왔다. 『Nature』 논문에서 그는 구아노신3인산(GTP) 친화도와 효과기 상호작용을 알로스테릭하게 제어하는 일련의 KRAS-G12C 저해제를 기술했다. 그의 팀은 이 까다로운 표적, 구체적으로는 스위치-II 포켓을 공략하기 위해 공유결합 저해제를 택했다. 사용한 워헤드는 다이설파이드, 비닐설폰아미드, 아크릴아마이드였다. 이 워헤드들은 모두 10번 위치의 시스테인 아미노산과 반응해 공유 황–탄소 결합을 형성했다.
쇼캇이 공동 설립한 바이오텍 웰스프링 바이오사이언스가 이 혁명적 발견을 사업화하려 했다. 그들은 공유결합 KRAS-G12C 특이 저해제를 내놓았고 이것이 세포 수준 활성을 보인 첫 화합물이었다. 2018년 공개된, 더 강직한 퀴놀린 함유 유사체는 in vivo에서 활성을 보인 최초의 공유결합 KRAS-G12C 특이 저해제 중 하나였다. 결국 웰스프링과 얀센이 협력해 2019년 7월 한 화합물을 임상시험에 올렸다. 그런데 그것은 이런 약물 중 세 번째로 임상에 진입한 것이었다. 앞서 출발했음에도 웰스프링의 화합물은 끝내 시장에 이르지 못했다.
2019년 4월 올랜도의 미국화학회 학술대회에서 암젠의 과학자들이 제약 산업 전체를 놀라게 했다. 공유결합 KRAS-G12C 특이 저해제인 후보물질 소토라십(sotorasib)이 진행성 KRAS-G12C 돌연변이 고형암 환자에서 최초 인체시험을 시작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약은 2022년 루마크라스(Lumakras)라는 상품명으로 FDA 승인을 받았다.
암젠의 성공에 뒤이어 미라티의 KRAS-G12C 특이 저해제 아다그라십(adagrasib, Krazati)도 2022년의 마지막 며칠에 승인되었다. 1982년 12번 코돈의 염기 하나를 확인한 일에서 2022년 두 개의 약이 승인되기까지 정확히 40년이 걸렸다.
05
종양억제유전자
Tumor Suppressor Genes
종양 발생이라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은, 1960년대 말에 개념화된 종양억제유전자가 1986년 세포융합이라는 기법을 거쳐 클로닝되면서 제자리에 들어갔다.
1.5.1헨리 해리스의 세포융합
1965년 헨리 해리스가 인간 세포와 마우스 세포를 융합했을 때 영국은 소란스러웠다. 대중 매체까지 뛰어들어 『데일리 메일』은 반인반수 키메라를 그린 만평을 실었다. 제목은 “아빠, 월트 디즈니가 누구였어요?”
1925년 러시아 포체프에서 태어난 해리스는 1929년 가족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다. 1952년 대학원생으로 옥스퍼드 윌리엄 던 병리학연구소에서 하워드 플로리(1945년 노벨상)의 페니실린 팀에 합류했다. 1964년 플로리를 이어 던 스쿨의 학장이 되어 은퇴까지 31년을 그곳에서 일했다.
1962년 말 해리스는 두 일본 과학자 오카다 요시오와 다도코로 준의 논문을 읽었다. 바이러스 유도 세포융합에 관한 그 보고가 해리스에게 세포융합으로 생명의 비밀을 밝힐 수 있으리라는 영감을 주었다.
세포융합, 어떤 이들이 '세포의 성교'라 농담하는 이 현상은 늘 일어난다. 정자와 난자가 융합해 배아를 만든다. 멘델의 완두 교배도 세포융합을 포함한다. 이런 자연적인 종내 융합은 스스로 일어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의 세포를 융합시키는 데는 인간의 창의라는 밀어붙임이 조금 필요하다. 1960년 프랑스의 조르주 바르스키와 동료들이 배양 중 세포의 자발적 융합을 관찰했다. 2년 뒤 오카다와 다도코로가 자외선으로 죽인 센다이 바이러스가 융합 세포의 수를 희귀한 자발적 사건에서 훨씬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한 현상으로 늘릴 수 있음을 보고했다. 오늘날 불활성화 센다이 바이러스는 세포융합을 강제하는 방법으로는 구식이 되었고, 폴리에틸렌글리콜(PEG)과 다이메틸설폭사이드(DMSO)가 같은 일을 더 잘한다.
1964년경 해리스는 옥스퍼드의 바이러스학자 동료 존 왓킨스와 함께 세포융합을 탐색했다. 오카다처럼 센다이 바이러스를 자외선으로 불활성화해, 인간 HeLa 세포와 마우스의 고악성 에를리히 복수세포를 융합시킬 수 있었다. 종간 잡종세포를 바이러스의 도움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인 것에 더해, 두 사람은 그 잡종세포가 DNA·RNA·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으며 잡종세포 안의 두 종류 핵이 모두 참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HeLa 세포는 볼티모어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헨리에타 랙스에게서 왔다. 1951년 서른 살에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자궁경부암 치료를 받을 때, 의사들은 그의 인지나 동의 없이 자궁경부에서 두 조각의 시료를 떼어 갔다. 그 시료에서 자란 세포 — HeLa 세포 — 는 세계 최초의 불멸 인간 세포였다. 영양분만 충분하면 끝없이 증식할 수 있었다.
이후 이 세포는 인간 유전체 연구와 폴리오 백신 개발을 포함해 수많은 의학적 돌파에 쓰였다. HeLa 세포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의학적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 불멸의 세포에 관한 이 전설은 2023년 8월 랙스의 가족이 서모피셔 사이언티픽으로부터 액수를 공개하지 않은 보상을 받으며 새 국면에 들어갔다. 72년이 걸렸다.
1965년 2월 『Nature』에 실린 해리스의 성공은 생물학의 분기점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 언론에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데일리 미러』도 만평을 실었다. 프랑스 유전학자 보리스 에프뤼시는 『뉴욕타임스』 기사를 통해 해리스와 왓킨스의 논문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해리스는 인간 세포와 유인원 세포를 융합하고 그 잡종을 '메이프(mape)'라 부르며 사태를 한층 더 선정적으로 만들었다. 어떤 동물 세포든 다른 어떤 동물 세포와도 융합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종의 장벽이 처음으로 넘어졌고, 생물학의 관점에서 우리는 다른 종에 비해 그리 특별한 종이 아니게 되었다.
1960년대 말 해리스는 실험용 마우스의 암세포와 정상 인간 세포를 페트리 접시에서 융합해 보았다. 종양유전자는 우성이라는 통념과 반대로, 놀랍게도 그의 잡종세포는 정상이었다. 1969년 『Nature』 논문에서 그는 건강한 세포가 종양세포가 돌연변이 과정에서 잃어버린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추정했다. 정상 세포의 어떤 인자가 종양의 결핍을 보상한다는 것이다. 악성 성질이 억제되었으므로 해리스는 이 미지의 유전자를 종양억제유전자라 불렀다. 이미 알려진 종양유전자와 반대의 효과를 갖는 유전자다. 따라서 적어도 배양 세포에서는 종양억제유전자가 종양유전자보다 먼저 발견되었다.
해리스의 결과는 한동안 논쟁거리로 남았다. 이 명백한 역설은 1987년 해리스가 스톡홀름의 조지 클라인과 함께, 배양이나 동물에서 계대를 계속하면 정상-암 잡종세포가 염색체 하나 이상을 잃을 때 결국 악성화된다는 것을 보이면서 해소되었다. 두 사람은 그 염색체 중 최소 하나가 종양원성의 억제자라고 제안했다.
UC 어바인의 에릭 스탠브리지가 1976년 해리스와 클라인의 결과를 인간 세포로 확장했다. 정상 인간 섬유아세포와 악성 HeLa 세포를 융합해 잡종을 만들면 정상 세포가 HeLa 세포의 악성 발현을 억제했다. 나아가 잡종세포의 반복 계대 배양 중 11번 염색체가 상실되면 악성 표현형이 되살아났다. 요컨대 어떤 정상 염색체를 한 벌만 도입해도 종양 형성을 억제할 수 있다. 이 결과로부터 억제유전자는 열성으로 작용하며 따라서 '두 번의 타격'이 필요하다는 추론이 나왔다.
종양억제유전자의 씨앗을 심은 것 외에도,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도구인 세포융합은 하이브리도마를 낳았다. 1975년 게오르게스 쾰러와 세사르 밀스타인이 개발한 단일클론항체의 토대다. 단일클론항체가 없다면 오늘의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없다.
그런데 해리스가 종양억제유전자를 아무리 설파해도 처음에는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개념이 상당한 힘을 얻은 것은 유전학자 알프레드 크누드슨이 희귀 유전질환 망막세포종에 대해 '두 번의 타격' 가설을 제안한 뒤였다.
1.5.2크누드슨의 '두 번의 타격'
망막세포종 같은 유전성 암은 드물다. 그러나 이 병의 연구가 최초의 종양억제유전자 Rb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망막세포종은 눈의 악성종양으로, 출생부터 네 살까지의 아이 약 8만 5천 명 중 1명에게 생긴다. 진단 시점에 영향받은 아이의 약 3분의 2는 한쪽 눈에만 종양이 있는 단안(unilateral)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양안(bilateral)이다. 양안 사례는 전부 유전성이고, 단안 사례는 약 15%만 유전성이다. 따라서 단안 사례는 비유전성 망막세포종으로 알려진다. 크누드슨이 1971년 이 현상을 유전학의 언어로 그럴듯하게 설명했다.
192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크누드슨은 1944년 패서디나 칼텍에서 이학사를 받았다. 거기서 토머스 헌트 모건, 앨프리드 스터티번트, 라이너스 폴링이라는 위대한 스승들에게 영감을 받았다. 194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마치고 몇 해 진료하다 1950년 칼텍으로 돌아와 박사과정을 밟았는데, 그 시기가 훗날의 노벨상 수상자 제임스 왓슨, 막스 델브뤽, 레나토 둘베코와 겹쳤다. 1956년 생화학·유전학 박사를 받았을 때 그는 미국에서 의학 학위와 연구 학위를 모두 가진 첫 세대에 속했고, 이것이 그의 경력에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후 크누드슨은 캘리포니아·텍사스·뉴욕의 의료센터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치료했다. 1965년에는 암 유전학을 다룬 장을 포함한 영향력 있는 저서 『유전학과 질병』을 냈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는 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었고, 문헌에 대한 그의 숙달이 자기만의 혁신적 생각을 세우는 데 좋은 위치를 주었다. 책을 쓰는 일이 연구를 낳은 사례다.
휴스턴 MD 앤더슨 암센터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가족력과 환자별 종양 개수를 포함한 망막세포종 48건의 데이터를 꼼꼼히 통계 분석했다. 발생률, 연령, 종양 발현 시기를 평가하면서 그는, 망막세포종이 종양유전자처럼 단일한 활성화 변이가 아니라 두 개의 병원성 변이에 의해 생긴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1년 그는 임상 관찰과 부합하는 선구적인 '두 개의 유전적 타격' 가설을 제안했다. 망막세포종이 생기려면 같은 세포 안에 두 개의 특정 돌연변이가 있어야 한다. 유전성 사례에서는 첫 돌연변이가 부모 어느 한쪽에서 유전되므로 몸의 모든 세포에 존재한다. 다른 돌연변이는 생후 몇 년 사이 비생식 세포에서 일어나므로 암이 더 일찍 형성된다. 유전형에서는 하나의 돌연변이가 몸의 모든 세포에 있으니 골암 같은 2차 종양이 생길 위험도 더 높다. 반면 비유전성 형태에서는 아이가 생식세포에 그 위험한 돌연변이를 지니지 않는다. 요컨대 종양 발생을 촉발하려면 최소한 두 번의 유전적 사건이 필요하다. 크누드슨은 이 열성 암 유전자군을 안티종양유전자라 불렀고, 지금은 종양억제유전자로 알려져 있다.
이어 두 번의 타격 가설에 대한 통계적 증거와 기능상실 돌연변이에 대한 세포유전학적 증거가 유전성·비유전성 망막세포종을 모두 흡족하게 설명했다. 1983년에는 UC 샌디에이고 웹스터 캐브니 연구실이 새로 등장한 재조합 DNA 기술로 망막세포종의 2-히트 모델을 검증했다.
크누드슨의 가설은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활성화만이 아니라 유전자 기능의 상실도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병인학에서 종양억제유전자가 갖는 중요성을 이 가설이 강하게 뒷받침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누드슨의 두 번의 타격 가설은 많은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해리스의 종양억제유전자도 점점 진짜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가설적 억제유전자 중 하나를 유전자 클로닝으로 분리하지 않고서는 회의론자들을 설득하기 어려웠다. RB 유전자 자체를 손에 넣어야 그 본성이 확정될 수 있었다. 그 일은 1986년 매사추세츠 안이과병원의 새디어스(테드) 드라이야가, 찰스강 건너 MIT 와인버그 그룹과 협력해 이루어 냈다.
1.5.3드라이야와 프렌드의 RB 클로닝
드라이야는 안과의사였지만 연구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망막세포종 시료를 꼼꼼히 모아, 병원이 내줄 수 있었던 자그마한 흄후드 하나로 유전학적 조사를 수행했다. RB 유전자(같은 유전자군에서 아형이 더 발견되며 RB1로 명명되었다)를 찾는 길은 우선 그 유전자를 품은 염색체 위치를 확정하는 일에서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의 소아과의사 애나 메도스가 동료들과 함께 자기 단안 망막세포종 환자 한 명의 세포유전학적 분석을 수행했다. 환자의 혈액 세포에서 13번 염색체의 결손을 발견했다. 더 살펴보니 염색체 밴드 13q14의 결손이었고, 우타 프랑케 그룹이 독립적으로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크누드슨과 함께 1976년에 결과를 발표했다. 2년 뒤 토론토대학의 브렌다 갈리가 한 가족에서 망막세포종의 연관을 보여 원인 유전자의 13q 위치를 뒷받침했다.
이제 크누드슨의 두 번의 타격 가설은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정상 세포에서 13번 염색체에 있는 그 유전자는 세포의 폭주하는 증식에 대한 브레이크로 작용했다. 유전자 한 벌이 사라져도 세포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남은 여분의 한 벌에 의지할 수 있으므로. 성염색체 X와 Y를 제외하면 우리 세포의 거의 모든 염색체는 짝을 이룬다. 그러나 두 벌 모두 사라지면 두 번의 타격이 곧 폭주하는 종양 성장으로 이어진다.
드라이야는 1985년 무렵 RB1 유전자 클로닝에 착수했다. 진행은 느렸다. 그 시절의 유전자 클로닝은 지금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사실 상당히 지루한 시행착오, 주로 착오의 연습이었고 즉흥성과 창의성,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운을 요구했다. 인간 효소 에스터레이스 D가 13번 삼염색체 아이들에서 과발현되는 것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RB1 유전자가 에스터레이스 D 유전자에 근접해 있다는 단서가 있었다. 따라서 에스터레이스 D의 발현 양상이 망막세포종 환자에서 13번 염색체의 부분 결손이나 중복과 비슷한 점을 보였고, 이 사실이 RB1 위치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와인버그 그룹의 박사후연구원 스티븐 프렌드가 협력에 들어가 RNA 전사체를 만들 수 있는 DNA 구간을 얻었다. 그 DNA가 기능하는 유전자를 담고 있다는 확실한 표지다. 그 구간에 있는 수십 개 유전자 중에서 RB1을 골라내기 위해 프렌드와 드라이야는 역전사효소로 RNA에서 DNA를 만들어 프로브로 삼았다. 1986년 드라이야는 동료들과 함께 망막세포종에서 13q14 유전자좌의 결손을 분자적으로 검출하는 데 성공해 노력의 방향을 옳게 잡았다. 결정적 단계는 구성적(정상) 유전체와 신생물 유전체 사이의 DNA 차이를 검출할 수 있는 그 프로브의 발견이었다. 6개월쯤 안에 협력은 결실을 맺었다. 최초의 종양억제유전자가 손안에 들어왔다.
두 달 뒤 로스앤젤레스 아동병원의 테디 펑과 UC 샌디에이고의 웬화 리도 RB1 유전자를 분리했다. 이 유전자는 성장 억제자이며 암 소인 돌연변이가 그 활성을 없앤다는 것이 밝혀졌다. RB1의 불활성화가 극히 드문 안구종양 망막세포종뿐 아니라 흔히 발생하는 여러 종양의 병인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이제 분명하다.
RB1에 대한 지식은 암 유전학 분야의 진정한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졌고, 종양억제유전자 개념의 광범위한 수용을 포함한다. 또한 망막세포종 환자에게 유전자 검사를 통해 결정적인 진단·예후 정보를 제공한다.
1.5.4TP53의 진짜 얼굴
종양억제유전자 TP53은 인간 암에서 가장 흔히 돌연변이되는 유전자로, 인간 암의 50%에서 발견된다. p53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이 유전자는 1979년에 발견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종양유전자로 잘못 여겨졌다. 돌연변이된 단백질 형태가 많은 암 조직에서 다량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p53 단백질은 DNA 종양 바이러스에서 발견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유인원바이러스 40(SV40)이라는 특정 바이러스를 조사한 결과였다. 믿기 어렵지만,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쓰인 소크 폴리오 백신은 SV40에 오염된 원숭이 신장세포에서 제조되었다. SV40이 신생 햄스터에서 암을 일으켰음에도, 다행히 소크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에게는 암을 일으키지 않았다.
1979년 3월 두 영국 과학자 데이비드 레인과 라이오넬 크로퍼드가 『Nature』에 보고했다. SV40 유도 종양을 가진 동물의 혈청으로 SV40 라지 T-항원을 면역침전시켰을 때, 겉보기 분자량 약 53 kDa의 비바이러스성 단백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두 달 뒤 프린스턴대학의 아널드(아니) 리바인과 대학원생 대니얼 린저가 『Cell』에 자기들도 p53 단백질을 찾았으며 그것 역시 SV40 라지 T-항원에 결합한다고 발표했다. 1979년 한 해에 세계의 다른 세 그룹도 p53 단백질을 거의 동시에 발견했다.
우스운 일이 하나 있다. p53이라는 이름은 인간 p53 단백질의 분자량이 53 kDa임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는데, 실제 분자량은 43.7 kDa다.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과학의 어휘에는 이런 화석이 종종 박혀 있다.
1984년 영국의 존 젠킨스와 동료들이 마우스 p53의 전장 상보 DNA(cDNA)를 클로닝했다. 프린스턴의 리바인 그룹을 포함한 몇 그룹도 같은 일을 해냈다. 당시 클로닝 효율이 낮았으므로, 단백질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세포를 찾아내는 데 특별한 노력이 들었다. 암에서 유래한 세포 같은 것 말이다. 바로 그 선택이 오해의 씨앗이었다.
한동안 p53은 흥미로운 단백질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 미스터리를 리바인 그룹의 모셰 오렌이 몇 해 뒤 풀어냈다. 이 암세포들이 고농도로 축적되는 돌연변이형 p53을 발현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때때로 p53이 종양유전자라는 견해에 반하는 실험 증거가 튀어나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예외로 간단히 기각했다. 리바인이 현명하게 관찰한 대로다.
“어떤 집단이 무엇을 믿게 되면, 그에 반하는 증거는 더 쉽게 기각되는 경향이 있다.”
아널드 리바인, Nature Reviews Cancer 9, 749 (2009)
이 문장은 이 장 전체를 요약한다. 피비게르의 벌레를 스물여섯 해 동안 붙들었던 것도, 에이버리의 DNA를 십이 년 동안 밀어냈던 것도, 프랭클린의 51번 사진을 두 걸음 앞에서 멈추게 한 것도 결국 같은 종류의 관성이었다.
1989년 존스홉킨스대학의 버트 포겔스타인이 인간 대장암에서 야생형 TP53 대립유전자가 돌연변이, 결손 또는 둘의 조합으로 빈번히 상실됨을 입증했다. 종양억제유전자의 전형적 특징이다. 한편 리바인 그룹의 캐시 핀리와 필립 하인즈는 또 다른 특정 p53 cDNA 클론을 연구해, TP53이 처음 믿어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종양억제유전자임을 발견했다. 서로 다른 두 길이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앞서 시험된 클론들이 실은 p53 암호 영역에 돌연변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마우스 종양 유래 p53 돌연변이체는 실제로 세포 형질전환을 촉진할 수 있으나 야생형 p53은 분명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야생형 p53은 강력한 종양억제자인 반면, 암 연관 p53 돌연변이체는 종양유전자의 속성을 지닌다.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종(種)이다.
TP53 변이는 대장·폐·유방·간을 비롯한 많은 암에서 흔하다. 많은 경우 한쪽 대립유전자가 돌연변이되고 다른 쪽은 상실된다. 종양억제유전자 불활성화에 관한 크누드슨의 2-히트 모델과 일치한다. 종양 발생 과정에서 TP53 종양억제유전자의 불활성화와 ras 종양유전자의 활성화는 협력한다. ras 돌연변이 하나만으로는 암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다. p53 같은 다른 단백질이 악성화를 막을 수 있다. 악성이 되려면 종양은 TP53 불활성화 돌연변이 같은 또 다른 결함을 가져야 한다.
종양억제유전자의 목록은 Rb, TP53, APC, NF1, VHL, WT1, BRCA1, PTEN 등으로 늘어났다. 여러 인간 암에서 이 문지기 유전자들이 하는 역할이 이제 훨씬 분명해졌다.
06
종양 바이오마커
Tumor Biomarkers
바이오마커는 종양학에서, 그리고 다른 치료 영역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미국 국립암연구소(NCI)의 정의에 따르면 바이오마커는 “혈액, 다른 체액 또는 조직에서 발견되는 생물학적 분자로, 정상 또는 비정상 과정, 혹은 어떤 상태나 질병의 징표가 되는 것”이다. “바이오마커는 질병이나 상태의 치료에 몸이 얼마나 잘 반응하는지 보는 데 쓰일 수 있다.”
암 생존율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조기 발견이다. 암 바이오마커는 진단, 예후, 표적치료를 개선하는 데 기여한다.
1.6.1바이오마커의 역사
앞의 네 가지 오래된 바이오마커는 모두 단백질 기반이다. 단백질 기반 바이오마커에서는 최근 면역조직화학(IHC)과 프로테오믹스로 특정 단백질 발현을 확인하는 방식이 쓰인다. 유방암의 HER2가 대표적인 예다.
염색체, RNA, DNA 같은 유전 기반 바이오마커도 있다.
- 염색체 이상 — 전좌, 결손, 증폭. CML의 필라델피아 염색체, 유방암의 HER2 유전자 증폭이 그렇다.
- DNA 기반 — 유전자 돌연변이, 마이크로새틀라이트 불안정성(MSI), 종양 돌연변이 부담(TMB). 예후와 치료 선택 모두에 정보를 준다.
- RNA 기반 — EML4–ALK 같은 융합 전사체의 검출.
1960년대에 피터 노웰과 데이비드 헝거포드가 발견한 필라델피아 염색체는 CML의 주목할 만한 세포유전학적 바이오마커다. 이것이 최초의 단백질 인산화효소 저해제 이마티닙(글리벡)의 발견과 개발을 크게 촉진하고 가속했다. 2001년 CML 치료제로 승인되었다. 염색체 하나의 관찰이 41년 뒤 하나의 약으로 도착한 것이다.
1.6.2바이오마커의 진전
필라델피아 염색체 외에도 유전 기반 바이오마커에는 순환종양 DNA(ctDNA)와 메틸화 DNA 바이오마커가 있다. 마이크로RNA(miRNA) 바이오마커도 아직 임상에서 쓰이지는 않지만 탐색되고 있다. 이들은 더 진행된 암에서 점점 더 자주 사용되며 치료 결정을 바꾸는 데 기여해 왔다.
myc, src, ras 같은 종양유전자와 Rb, TP53, PTEN 같은 종양억제유전자는 여러 암종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종양 바이오마커에 속한다. 암의 후성유전 바이오마커에는 DNA 메틸화와 히스톤 변형이 포함된다. 예컨대 FDA는 2025년 8월 히스톤 H3 K27M 변이 확산성 중간선 교종 치료를 위해 도르다비프론(dordaviprone)에 가속승인을 부여했다.
더욱이 단일염기 돌연변이는 결정적인 DNA 기반 바이오마커다. TP53 종양억제유전자의 변화는 모든 산발성 암의 절반 이상에서 검출되며, KRAS 종양유전자의 변화는 전이성 확산을 신호한다. KRAS-G12C는 암에서 흔한 돌연변이다. BTK의 C481S, BRAF의 V600E, EGFR의 T790M 돌연변이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생검은 침습적이다. 이에 비해 액체생검은 종양 DNA, 순환종양세포, 엑소좀의 비침습적 검출에 유용함이 입증되었다. 다만 엑소좀은 아직 임상에서 쓰이지 않는다.
면역종양학에서도 여러 면역학적 바이오마커가 등장했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PD-L1일 것이다. 머크의 PD-1 저해제 펨브롤리주맙(키트루다)이 최고의 약 지위에 오른 것은, 임상시험에서 환자 선별을 위한 바이오마커로 PD-L1을 선택한 머크의 결정에도 힘입은 바 있다. 추가적인 면역학적 바이오마커로는 종양침윤 림프구(TIL)와 종양 돌연변이 부담(TMB)이 있다. 둘 다 면역치료의 결정을 안내하는 데 중요하다.
액체생검에서 탐색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바이오마커는 종양 유래 엑소좀(TDE)이다. 엑소좀은 세포가 분비하는 나노 크기 세포외소포로 여러 체액에 널리 존재한다. TDE는 단백질, 지질, RNA, DNA를 화물로 싣고 있는데 이것이 혈관신생, 면역회피, 전이를 촉진해 종양 진행을 강화할 수 있다. 엑소좀 내 단백질·RNA·DNA는 엑소좀 안에 풍부하다는 점 때문에 모두 잠재적인 암 진단·감시 표지가 된다. 2016년 세계 최초의 엑소좀 종양 진단검사 ExoDx Lung (ALK)가 출시되었다. 비소세포폐암(NSCLC)의 진단과, ALK 저해제 표적치료를 위한 환자 선별에 쓰일 수 있다. 오늘날 멀티오믹스의 도움으로 엑소좀은 여러 암종의 잠재적 바이오마커로 폭넓게 조사되고 있다.
1.6.3바이오마커의 미래
인공지능(AI)과 기계학습(ML)의 등장이 멀티오믹스 데이터를 통합해 포괄적 바이오마커를 개발하는 흐름을 밀어 올렸다. 프로테오믹스, 유전체학, 대사체학의 방대한 데이터를 이제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게다가 AI와 ML은 복잡한 바이오마커 데이터의 해석을 돕는다. 그 결과로 종양 바이오마커의 발견과 활용은 종양학 의료에 멀리 미치는 영향을 갖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 장이 끝난다는 사실은 조금 상징적이다. 굴뚝의 그을음을 눈으로 관찰한 데서 출발한 이야기가, 데이터를 해석하는 기계에 도착해 멈춘다.
07
맺음
Summary
야마기와의 화학적 발암을 돌아보면, 토끼 귀에 종양을 일으킨 발암물질의 정체는 이제 잘 규명되어 있다. 콜타르의 주요 발암물질은 안트라센과 3-메틸콜란트렌 같은 PAH다.
에임스의 '발암물질 = 돌연변이원' 이론은 오늘의 종양유전자·종양억제유전자 전제로 설명할 수 있다. 2013년에는 영국 웰컴 생어 연구소의 루드밀 알렉산드로프와 마이클 스트래턴이 돌연변이 시그니처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특정 돌연변이 패턴을 특정 노출과 연결했다. 굴뚝청소부의 음낭에 남은 그을음이 이제 유전체에 남긴 서명으로 읽힌다.
완두에서 인간까지 모든 복잡한 생물은 동일한 유전 기제로 부모에서 자손에게 유전자를 전달한다. 암 유전자가 우성이므로 그것은 부모에서 자손으로 끊임없이 전달된다. 일부 암세포에서는 염색체 수가 홀수다. 암이 유전적 돌연변이의 결과라는 강력한 징표다.
암은 종양유전자의 기능 획득(gain-of-function), 또는 종양억제유전자의 기능 상실(loss-of-function), 혹은 둘 다의 결과다.
1994년경 암이 유전적 질환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새로운 정밀의약, 무엇보다 단백질 인산화효소 저해제로 향하는 문이 반쯤 열렸다. 그 이야기는 원서 제3장의 몫이다.
부록
노벨상 원장
A Ledger of Prizes — right, wrong, late, and never
이 장을 두 번 읽으면 하나의 부차적 서사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노벨상이라는 제도가 이 병인학의 역사에서 무엇을 맞히고 무엇을 놓쳤는가. 저자는 이 계보를 숨기지 않고 장 전체에 흩어 놓았다. 흩어진 것을 한자리에 모으면 이런 표가 된다. 상을 준 것과 주지 않은 것 모두가 기록이다.
| 연도 | 인물 | 사유 | 판정 |
|---|---|---|---|
| 1926 | 요하네스 피비게르 | 선충이 위암을 일으킨다는 학설. 1937년 재현 불가로 폐기. 그가 본 병변은 비타민 A 결핍에 의한 조직 증식이었다. | 오심 |
| 1933 | 토머스 헌트 모건 | 유전에서 염색체가 하는 역할의 발견. 다만 그는 1910년까지 염색체설을 거부했고, 네티 스티븐스의 성염색체 발견은 상을 받지 못했다. | 정심 |
| 1946 | 웬델 스탠리 |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의 활성 성분을 단백질로 지정. 틀린 결과였다. | 오심 |
| 1946 | 헤르만 뮐러 | X선이 유전자를 손상시킴을 입증. 발암물질이 곧 돌연변이원임을 처음 보였다. | 정심 |
| 1962 | 왓슨 · 크릭 · 윌킨스 | DNA 이중나선 구조. 결정적 데이터를 제공한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1958년 37세에 세상을 떠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살아 있었다면 윌킨스보다 우선했을 것이다. | 정심 누락 |
| 1966 | 페이턴 라우스 | 발암 바이러스. 1911년 첫 보고로부터 55년 뒤, 89세에 받았다. | 지연 |
| 1976 | 바루크 블럼버그 | B형 간염 바이러스와 간세포암. | 정심 |
| 1988 | 하랄트 추어 하우젠 | 인유두종바이러스와 자궁경부암. | 정심 |
| 1989 | 비숍 · 바머스 | 레트로바이러스 종양유전자의 세포 기원. 결정적 실험을 수행한 도미니크 스테엘린과, 2-히트 모델과 인간 ras를 확립한 로버트 와인버그는 제외되었다. | 정심 이견 |
| 2005 | 워런 · 마셜 |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와 위암. 1926년 피비게르의 오심으로부터 79년 뒤 감염과 위암의 관계가 제대로 인정되었다. | 정정 |
| 2020 | 올터 · 호턴 · 라이스 | C형 간염 바이러스와 간암. | 정심 |
| — | 야마기와 · 이치카와 | 화학물질로 동물에 암을 유도한 최초의 성공. 최소 세 차례 후보 지명. 상은 1926년 피비게르에게 갔다. | 무관 |
| — | 오즈월드 에이버리 | 유전자가 DNA로 되어 있음을 밝힌 20세기 최대의 생물학적 발견. 생전에 40회 이상 지명. 1955년 간암으로 사망. | 무관 |
| — | 어윈 샤가프 | A=T, C=G의 1:1 비. 스스로 그 의미를 밝히지 못했다. 이후 25년간 분자생물학을 증오했다. | 무관 |
표를 만들어 놓고 보면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첫째, 오심은 늘 명성과 인맥이 검증을 앞지를 때 생겼다. 피비게르와 스탠리 모두 그랬다. 둘째, 누락은 늘 설득의 실패이거나 시간의 문제였다. 에이버리는 세상을 설득하지 않았고 프랭클린은 시간을 얻지 못했다. 오슬러의 저 냉정한 문장이 이 표의 각주로 붙어야 한다. 과학에서 공로는 세상을 설득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원서 제1장의 일반 독서목록
더 읽을 것
아래 여덟 권은 원서 제1장 말미의 General Readings에 실린 목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와 별도로 이 장에는 56건의 원주가 달려 있다.
- Henig, Robin Marantz. The Monk in the Garden: The Lost and Found Genius of Gregor Mendel, the Father of Genetics. Marine Books, 2000.
- Judson, Horace Freeland. The Eighth Day of Creation: Makers of the Revolution in Biology, Commemorative Edition. Cold Spring Harbor Laboratory Press, 1996.
- Markel, Howard. The Secret of Life: Rosalind Franklin, James Watson, Francis Crick, and the Discovery of DNA's Double Helix. W. W. Norton, 2021.
- Morgan, Gregory J. Cancer Virus Hunters: A History of Tumor Virology.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22.
- Mukherjee, Siddhartha. The Emperor of All Maladies: A Biography of Cancer. Scribner, 2011.
- Norrby, Erling. Nobel Prizes: Cancer, Vision and the Genetic Code. World Scientific, 2019.
- Weinberg, Robert A. One Renegade Cell: How Cancer Begins (Science Masters Series). Basic Books, 1999.
- Scheffer, Robin Wolfe. A Contagious Cause: The American Hunt for Cancer Viruses and the Rise of Molecular Medicin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9.